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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기행 (Ⅴ) (80.06.21)

이보규 2007. 8. 27. 23:42
 
 

제주도 기행Ⅴ  (80.06.21)

 

 제주도 일원의 자연을 돌아보기 위해 마련된 버스에는 스스로 미스김(金)이라고 소개한

명랑하고 예쁜 관광 안내양이 함께 차를 타고 있었는데 어쩐지 호감이 갔다.

 

항몽유적지를 뒤로하고 한라산으로 향해 가는 동안 버스 통로 앞에 뒤돌아서서

 마이크를 잡고 제주도 안내를 시작하고 있었다.

 

상냥한 말씨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계속해서 「오른쪽을 보시오」

또는 「왼쪽에 보이는 것은…」하면서 극장무대에 나타난 주인공처럼 안내를 계속한다.

 

마치 내가 3년 전에 처음 왔을 때 듣던 안내를 그대로 거듭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도청직원의 안내도 그랬고 택시운전사와 식당 종업원들도 그랬다.

 

우리 일행 중에는 제주도를 처음 방문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안내의 내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데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제주도가 옛날 그대로의 자리에 하늘도 땅도 모두 변하지 않았다 해도

관광안내만은 좀더 연구하고 새로운 내용을 찾아내서

거듭 찾는 관광객들에게 항상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하든가,

아니면 조용히 구경하도록 해 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인내양의 차내 방송을 중단시킬 만한 용기는 없었으나

어느 교수 한분이 용기 있게 나의 생각대로 안내양을 불러 말한다.

 

「오늘 같은 날은 조용히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스스로 보고 느끼도록

시간을 주고 항상 똑같은 말은 안했으면 좋겠다.」고 제의했던 것이다.

 

안내양은 그만 쑥스럽게 자리에 앉아 버렸고 버스는 혼자서 엔진 소리를 내며

한라산 횡당보도 아스팔트 위를 기운차게 치달리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길에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도로변에는 한라산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높은 산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따금 도로가에 나와 놀던 야생 꿩이 자동차 소리에 놀라 날아올라 빨갛게 피어난 동백꽃 숲으로

사라질 때마다 한라산 새봄의 정취가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한라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영실에 도착하기 까지는 꼬박 1시간이 걸렸다.

 

아직 일반 관광객들이 자동차로 올라올 수 없는 해발 1천 2백m에

영실기암은 일명 오백 나한이라 불리는데 천연의 기암절벽과 우뚝우뚝 솟아있는 기암들은

정말 절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나는 산을 좋아해서 서울 근교의 명산인 도봉산을 비롯하여

강원도 설악산ㆍ충청도 속리산ㆍ내장산ㆍ덕유산 등을 모두 두루 돌아보았지만

일찍이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위, 그리고 절벽ㆍ나무들에서 풍기는 또 다른 신비를 느낄 수는 없었다.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의 미적(美的)감각과 차원 높은 창조능력에 다만 머리 숙여 감사할 뿐.

 

인간이 다듬었다는 조형미는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대자연의 균형과 조화속에 펼쳐 있는

만물의 선과 색의 모방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 일행이 머무른 자리에는 돌로 다듬어 세운 자연보호헌장비가 돋보였지만

헌장비 옆에 커다랗게 짓고 있는 콘크리트 건물의 시민 휴게실은

관광객을 위해 유익한 편익 시설은 될지라도 정관을 가로막아

오히려 아름다운 풍경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나니 마음이 한결 맑아지는 것 같았다.

 

떠나기가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다시 버스에 올라

중문(中文)면 천제연폭포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한국자연보존 협회와 난 애호가들이

함께 높은 벼랑에다 제주도 자생 난(蘭)을 인공적으로 이식하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전설에 의하면 옥황상제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던 곳이라서 천제연이라고 명명했다는 것.

 

21m 높이의 폭포 양쪽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숲, 계속이 온통 나무로 가득 차 있고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맑은 물은 못에서 넘쳐 큰 바위 사이를 지나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긴 머리 예쁜 선녀들이 새소리 음악을 들으며

한가로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나무꾼이 사슴의 말에 따라 선녀의 옷을 감추어 아내로 맞이했다」는

전설의 고향이 여기가 아닐까 해서.....

 

한동안 폭포에 취해 있다가 뒤돌아보니 우리 일행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