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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일본시찰기-③-대만과한국은 수출경쟁국 (81.01.31)

이보규 2007. 9. 5. 16:38
 

대만ㆍ일본(日本)을 돌아보고-③

 

            대만과 한국은 수출경쟁국

 

                                    서울시 새마을지도계장 이보규


대만과 우리나라는 같은 아시안의 황색인으로 유사한 정치적 여건 때문에

외교면에서도 우방으로서 유대를 강화해오고 있으나 수출시장에서는 각각

선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상호 각박한 경쟁관계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는 대만이 일본(日本)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아온 점이라든가

주산업이 농업에 기반을 두어오다가 최근에 와서야 공업화를 통한

수출증대 시책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점 등이 또한 같다.


양국은 역사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문화적으로도

같은 한자(漢子)를 사용하는 공통점과 유교적 사상에 기반을 둔

가치관의 형성에 있어서도 유사한 점이 너무도 많은 나라다.


나는 마음속으로 경쟁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한국 대사관 가까이 미리 예약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서

곧바로 대만에서 세계 제일이라 자랑하는 국립 고궁박물원(國立 故宮博物阮)을

구경하기 위해 나섰다.


돌이켜보면 중국은 동양의 시장이요, 얼굴로 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중국은 세계 속에 자랑할 수 있는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지녔지만

오늘의 중국과 비교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아닐까.


우리 일행이 찾아간 고궁박물원은 장제스(張介石)총통 시절에

대북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남쪽으로 양지바른 산언덕 중간을 깎아

새로 건립했다는 건물로 안으로 들어가 구경도 하기 전에

소장하고 있는 유물의 숫자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이 박물관은 1949년 중국(中國)대륙을 통치하던 국민당 정부가 중국(中國)본토의

북경(北京)박물관에 소장되었던 유물을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할 때

함께 옮겨온 것으로 그 소장품이 무려 60만점이나 되어

모두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고 진열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것만 하루 종일 보아야할 양이나 몇 만점에 불과하며

3개월에 한번씩 진열품을 바꾸어도 20년이 걸려야 겨우 한번씩의 진열이 끝나기 때문에

아직도 박물관 소장품을 다 구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박물관 건물은 현대식으로 웅장하게 지어졌고 건물 앞 넓은 뜰은 비탈에 계단을 쌓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깨끗하게 경관을 가꾸어 놓아 한층 돋보이기도 했다.


건물 왼쪽 편에는 중정(中正) 장제스(張介石)의 대형 동상이 서있는 모습으로

세워져 있고 건물의 현관에는 아취 모양의 붉은색 바탕간판에 흰 글씨로

『국부장제스)』이라고 씌어 있었다.


오늘날 자유중국(自由中國)을 처음세운 국민당의 사상의 기초가 되었던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사상을 그대로 계승시키고 있다는데

그 쑨원(孫文)도 국부(國父)라 칭하고 있다.


박물관 입장료 15엔티(한화 약 300원)씩 내고 진열된 소장품을 둘러볼수록

더욱 경탄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씨ㆍ그림ㆍ조각 등 미술품을 비롯하여 토기ㆍ석기ㆍ병기ㆍ죽세공품ㆍ동물 뼈로 만든

장신구 등 유형별로 방을 따로 막아 보기 좋고 품위 있게 진열되어 있는데

솔직히 고백하면 이런 방면에는 거의 문외한인지라

그냥 그림책 넘기듯 방마다 돌아다녔지만

어느 방을 지나가다 장식용 옥돌이 너무도 정교하게 다듬어졌기에 걸음을 멈추고

설명서를 자세히 보니 기원전 1천2백20년대 작품이라 쓰여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밖에도 대부분의 작품이 전국시대(BC 4백80년대)를

전후한 것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마냥 부러웠다.


우리나라는 어찌하여 불과 4백 년 전인 이순신(李舜臣)장군이 만든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조각 하나를 보존하지 못했는가를 생각하니

안타까워 가슴이 뜨거워졌다.


마치 중국 고대의 찬란했던 문화를 한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불현듯 불과 2백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인들이

수천 년을 지키고 가꾸어온 중국의 박물관을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할까 하는 호기심에서 국적은 알 수 없지만 서양 사람들끼리

둘러서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보고 있기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들은 코믹하게 만든 여인의 반나체의 조각품 앞에 서서

태평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외국 관광객 중에는 일본인들이 제일 많다고 안내원이 귀띔을 했다.

거의 같은 구조의 방을 1시간 30분 동안 돌아보니 모두 똑같이 보여서

그냥 뒤돌아 나오고 말았다.


박물관 입구에 있는 휴게실을 찾아들자 한 모퉁이에서 기념품을 팔고 있는데

주로 동양화그림ㆍ붓ㆍ벼루ㆍ먹 등이 제일 많았다.


나는 그림 하나를 사다가 집에 가져갈까, 선물을 할까 무척 망설이다가

더 값 싼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만져만 보고 그만두었더니

끝내 그림을 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동양문화의 발상지인 중국은 한자의 출생지답게 온통 한자(漢子)투성이었다.

한자는 뜻의 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표현을 달리 하고 있는 글자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건물의 비상구(非常口, Exit)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태평문(太平問,Exit)또는 대안문(大安問,Exit)이라는 표지판을 써서 붙였고

주식회사는 유한회사로, 이발소 식당은 이발청과 찬청으로 표시되어 있어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시청이나 산림청을 보고

오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려고 하니 결국 중국식당에 갈 수밖에 없었고,

막상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중국음식이라고 하는

우동도 자장면도 없다는 말을 듣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대만에서는 물론 양식과 일식 식당이 있었지만

주로 북경요리와 사천요리로 되어 있었고

이곳 의원 주민들은 주식이 쌀이고 본토에서 건너온 한족은

분식을 주식으로 한다는 말을 듣고 보니 작은 나라에 모여 살면서

식성도 각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대만에서 손꼽힌다는 큰 정통 중국식 사천요리집 지하실의 넓은 방으로

들어가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탁에 나누어 앉아

꼬박 2시간을 먹어야 하는 식사를 시작했다.


한 가지 요리를 먹고 나야 또 가져다주는 중국정식.

나오는 음식마다 맛과 모양이 달라서 호기심에 지루한 줄도 모르고 먹고나니

너무 배가 불러서 고역을 치렀다.


이곳에서는 이와 같은 식사습관 때문에 관공서나 회사의 점심시간도

12시부터 오후2시까지 꼬박 2시간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이 결국 먹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 그럴 듯 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