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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빈민가출신 조센징 글로벌 통신거물

이보규 2013. 3. 24. 14:05

 

 

 

★손정의 빈민가출신 조센징 글로벌 통신거물★

 

 

2012 글로벌 녹색성장 서밋(이하 GGGS) 개막총회 참석차 방한한 손정의(Masayoshi Son) 

 

소프트뱅크 회장이 10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사파이어볼룸에서 단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2.5.10/뉴스1 ⓒ News1 박철중 기자

 

일본 통신업체 소프트뱅크가 15일 미국 3위의 이동통신업체 '스트린트-넥스텔' 인수를 공식 발표하면서

소프트뱅크를 이끄는 마사요시 손(한국명 손정의) 회장에 대한 관심이 또 다시 고조됐다.

 

AFP통신은 이날 소프트뱅크의 스트린트 인수 소식을 전하면서 '마사요시 손: 빈민에서

통신거물로(Masayoshi Son: From pigswill to telecoms tycoon )'라는 제목으로

손 회장에 대한 인물 기사를 내보냈다.

 

통신은 이번 인수에 대해 "일본에서 가장 컬러풀한 사업가 중 한 명인 손 회장의 경력을 보여주는

일련의 인수합병 거래 중 하나"라면서 "손 회장이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루퍼트 머독 등과 같은

세계적 경제인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미·일 양국을 주무르는 통신업계 '큰손'이 된 손 회장의 어린 시절은 현재의 화려함과는 극과 극의 차이이다.

 

손 회장은 1957년 일본 남부 규슈의 사가현 어느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손 회장의 할아버지 손종경은 대구 출신으로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탄광에서 일하다가 사가현에 정착했다.

 

손 회장의 부친과 가족들은 식민지였던 한국 출신에 대한 차별을 받으며 돼지와 닭을 키우며 근근히 생활했다.

 

그는 지난 1999년 연설을 통해 "어린 시절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끌던 카트에 앉아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너무 말라서 앉아 있으면 아플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웃집에서 남긴 음식을 모아서

가축에게 먹였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며 "나도 열심히 일했다"고 덧붙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근면함이 결국 보상으로 돌아왔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손 회장은 72억달러

재산으로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리(유니클로) 회장에 이어 일본의 두번째 갑부다.

 

손 회장은 16세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분교에서 경영학 공부를 하면서 비즈니스 활동을 시작했다.

 

재학 시절부터 기술전문가이자 기업가로서의 재능을 펼친 그는 1979년 음성 기반 다중언어번역기를 발명해

샤프에 1억엔을 받고 팔기도 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1년 후인 1981년 그는 소프트웨어를 도매하고 컴퓨터 잡지를 출반하는 소프트뱅크를 창립했다.

 

소프트뱅크는 1994년 상장 이후 일본 기업 뿐 아니라 해외기업까지 인수하는 공격적인 전략으로 끊임없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1996년 야후 재팬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올랐다. 2001년 일본 내에서 최초로 초고속인터넷 ADSL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 2006년 영국의 보다폰 일본법인을 1조7500억엔(약2230억달러)에 인수하면서 통신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이번 스프린트 인수는 보다폰 인수와 비교되면서 글로벌 통신업계에 주목을 끌고 있다. 소프트뱅크가 보다

폰재팬을 인수한 지 1년 만에 사상 최대 순이익을 냈다.

 

 

 

굶주림 차별 뚫고나온 꽃 일본의 리더가 되다.

 

 

소년은 돼지 양과 한방에서 먹고 자야만 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어린 시절이었다.
집이 너무 가난해 축사를 따로 마련할 형편이 안 됐다.
조센징이라고 부르며 이유 없이 괴롭히는 일본 아이들에게
왕따도 당했다 그가 자란 마을은 일본인들이 외면하는 조선인
마을이었다. 할아버지는 굶주림을 피해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밀입국자였다. 아버지는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집에서 밀주를 만들어 내다 팔고

사채업으로 돈을 불린 뒤 빠찡꼬 가게를 열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너는 재일 한국인이니까
일본 사람보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출세 못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다.

소년은 아버지의 충고대로 그 어느
일본인보다 열심히 살았다.
19세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워 그대로 실천했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이 소년은 일본 최고의 부자이자 정보기술
(IT)업계 리더가 됐다. 바로 손마사요시(孫正義·한국명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다.
일본 사회의 가혹한 재일한국인 차별도 그의 비상한 능력을 꺾지 못했다

손 회장은 2006년 일본 대학생이 존경하는 기업인 2위에 뽑히기도 했다.

 

 

 




“손정의를 일본 총리로” 주장도

 

그러나 손 회장은 리더십이 실종된 일본사회에서 방향 제시와 신속한

대안 마련으로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일부 일본인은 1990년 일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한국인으로
33년을 살았던 그에게 “일본 총리가 돼 달라” 며 열광한다.
그는 4월 초 지진 이재민을 위해 개인성금

최고액인 100억 엔(약 1300억 원)을 기부했다.

일본인 중 최고 기부자인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유니클로 회장의

10억(약 130억 원)보다 무려 10배나 많은 금액이다.

 


 

 


 

 

손 회장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방사능 누출 사고를 계기로

녹색에너지 혁명을 그는 지난달 말 1000억 엔(약 1조3000억 원)을

투자해 일본 전역에태양광발전소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아예 없애자는 ‘탈(脫)원전’

운동의 손 회장은 자신이 퇴직할 때까지 소프트뱅크

회장으로서 받는 전액을기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엔존경과 신뢰 지지가 뒤따랐다.

또 손 회장은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일본이
전력난에 빠지자 한국

KT와 소프트뱅크가 자회사를 설립해 부산 근교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산센터 파괴와 전력난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일본 기업의
전산 데이터를 싸고 안전하게 저장해주기 위해서다
이 데이터센터는 10월부터 가동에 들어간다.
KT와 소프트뱅크의 협상은 일주일 만에 끝났다.
일본 행정당국이 매뉴얼과 형평성만 고집하다 지진 이재민
구호품 배급 작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과 대조적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구호품을 전달받지 못해 굶어죽은
사람들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20일 방한한 그는 이명박 대통을 만나 자신이

추진 중인

‘고비테크 프로젝트(고비사막 태양광발전
프로젝트)’를 설명한 뒤 한국 일본 중국이 함께 추진하자고 건의했다.

 

 


 

 

 

비난을 일축하는 재치 물론 일본 내에선 손 회장의 이 같은 행보를

4월에는 한 테마파크 임원을 자칭하는 사람이 회장의 거액 기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비판하는 내용(‘재해는 슬프지만 기업가 자질은 없다’)을
트위터에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태양광발전 계획에 대해서도 원전 찬성론자들은 “허무맹랑한 주장”

 

이라며
반발했다
재일한국인 차별 등 혐한을 주도하는 극우세력은

소프트뱅크의 주가를 높이기 위한 ‘쇼’라는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은 위기의 순간에 뛰어난
결단력을 보이는
손 회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손 회장의 강연 동영상 DVD 등과
함께 최근 주목받는 것은 그의 트위터다.

 

 



 

 

그의 트위터는 팔로어가 123만여 명으로 내에 가장 많다

그는 바쁜 일정에도 트위터를 꼼꼼하게 관리하며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전개하는 한편 팔로어들의 여러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해 호응을 얻고 있다.

손 회장의 트위터엔 경영인으로서의 면모와 함께
그의 인간적인
부분이나 의외의 모습도 잘 드러난다 그는 한 팔로어가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 팀의 인터리그 세 번째 1위가 15일 확정됐다며
축하하자 “만∼세!”라며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 극우세력이 “손정의는 일본에서 나가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마”
라며 막말을 남겼을 때는 “어디로 가면 (돼)?” 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남원상 동아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