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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수경스님 “권력과 돈, 두바퀴 수레서 내려오라”

이보규 2008. 7. 12. 12:54

“비구란 다만 걸식하는 자가 아니다.

세속의 모든 법을 받아 지니고서 어떻게 비구라고 이름할 것인가.

공덕과 허물을 모두 떠나서

언제나 옳고 바른 행을 닦으며

그 마음에 두려움 전혀 없으면 그를 곧 비구라 하리라.”

 

잡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 말에 비추어 현재 조계종단의 승가가 처한 모습을 살피면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중생제도는커녕 자기제도도 버거운 집단으로 보일 정도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극히 일부 승려의 비리를 섣불리 일반화하고, 의혹 수준의 문제제기를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손익 계산은 세간의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조계종의 승가 집단이 진정 수행 공동체라면, 그러한 비리를 가능케 한 구조를 만들어낸 구성원 모두가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 집단으로서의 위의는 결코 바로 세울 수 없다.

-‘사회 건망증’ 바라며 방관자세-
“대중이여, 부디 나를 가엾게 여겨 (내 죄를) 지적해 주시오. 죄를 알면 마땅히 제거하리라.”

안거를 마친 부처님께서 대중 앞에서 한 말이다.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

내부 성찰과 참회가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 조계종단의 태도는 어떠한가.

종단 운영의 책임을 맡은 어느 누구도 내부 성찰을 촉구하고 대중 앞에서 공개 참회하는 수행자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직 ‘사회적 건망증’만을 해결책으로 여기며 방관하고 있다.

올해 초 나는 ‘불교평론’ 봄호에 ‘조계종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조계종단의 문제점을 진단한 바 있다.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지금 조계종단은 ‘권력’과 ‘돈’이라는 두 바퀴의 수레를 타고 위태로운 질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나의 문제인식은 현실로 드러났다. 그런데 당시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불교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언론이 신정아씨의 얼굴 뒤에 숨어서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까지 거론하며 불교계 전체를 부패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뉘앙스의 보도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독자들에게 ‘사실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기보다는 부정적 ‘가치 판단’을 우선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선 조계종은 종단협의회라는 우산까지 들고 나와 일부 승려의 문제로 불교계 전체를 음해한다며 공세적 방어에 나섰다.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서는 당연한 문제제기라 할지라도 이 또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조선일보의 보도보다 더한 모욕은 상당수 언론에서 조계종 중앙종회의 계파간 알력을 분석하면서 공공연히 ‘여당’과 ‘야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종단 정치권이 세속 정치판보다 한 술 더 뜬다는 식의 보도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이 분명해진다.

조계종단 총무원 집행부의 권력화와 종회 계파 간 권력다툼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참으로 당혹스러운 사실은 현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불교계 안팎에서 드높은 학덕과 수행 이력으로 칭송을 받는 분이라는 점이다.

이런 분이 총무원장으로 계시는 종단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수행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실 지금도 대부분의 스님네들은 투철히 수행하고 일념으로 기도하면서 본분사에 충실하고 있다.

조계종 정치권에 대한 나의 비판도 그러한 스님네들의 정진력에 의지하고 있다.

-정치권력과 거리유지도 실패-
요컨대 신정아 사건의 본질은, 신정아씨 개인과 관련된 정부 관료와 일부 문화계, 재계, 학계 인사와 몇몇 스님들의 잇속 챙기기였다. 그런데 왜 불교계 전체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져야 하는가.

신정아 사건을 계기로 조계종 정치판의 맨얼굴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평소 ‘무소유’를 말하면서 늘어놓던 온갖 거룩한 말씀은 그야말로 거짓이었다는 얘기다.

무소유의 상징인 ‘삼의일발’조차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소유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는 물질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종단 정치판의 일부 소임자들의 실제 모습은 돈과 권력에 찌들대로 찌들고 속박된 모습이다.

태산 같은 번뇌 뒤에는 그만큼의 깨달음이 있다 했다.

결론 삼아서 그 태산 같은 번뇌의 실체를 적시해 보자.

이미 밝혔듯이 조계종단 총무원과 중앙종회의 권력화와 세속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더하여 종단 정치권은 세속의 정치권력과의 거리 유지에 실패했다.

이로써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계종 정치권의 치부가 정적 공격의 수단으로 동원되었고, 이것이 언론사에서 선호하는 정당의 이익과 선정적 보도 태도와 맞물리면서 불교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재생산된 것이다.

더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조계종 총무원과 중앙종회에서 해법을 내놓아야 할 때다.

간단하다. 더이상 숨기고 가릴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문제를 직시하고 아는 대로, 배운 대로 실천하면 된다.

수행자는 본분사로 돌아가고 총무원은 청정성을 회복하는 길 말고는 없다.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그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삼각산 화계사에서 수경 합장|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화계사 주지〉

출처 : 만남의 길 위에서
글쓴이 : 아침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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