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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대동여지도 - 배우성 글

이보규 2008. 8. 6. 07:20


독도와 대동여지도


배 우 성(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미국 지명위원회의 독도 표기 문제로 우리 사회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우여곡절을 거쳐 독도 표기는 원상회복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주권 미지정 표시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 섬은 여전히 ‘리앙쿠르 록스(Liancourt Rocks)’로 표기되어 있다. 원상회복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장기적이고도 종합적인 대책이 절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0만원권 지폐와 대동여지도 도안


그런데 독도 문제는 작년 연말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한국은행이 고액권 보조 도안으로 대동여지도를 선정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자,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반대했다.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동여지도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역사학자와 지리학자들이 찬탄하고 있다. 하지만 독도 문제에 관한 한 대동여지도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적지 않은 것이다.


논란이 일었지만 한국은행은 고액권 화폐에 대동여지도 도안을 쓰겠다는 원래의 방침을 고수했다. “목판본 대동여지도에는 독도가 없지만, 목판본 이전에 만들어진 필사본에는 독도가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은행에 자문을 해준 한 지리학자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그 분은 이 방면에서 신뢰할만한 전문가이므로 나 역시 대동여지도가 이미지 도안의 차원에서 활용되는 것인 한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대동여지도 도안이 문제가 되면서 나온 반대론 중에 내가 흥미롭게 읽은 것은 이런 의견이었다. “간도는 어쩌라고?”  대동여지도에는 간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영토의식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네티즌은 아마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대동여지도를 고액권의 도안으로 활용한다면 간도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약해질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대사가 반도 바깥에서 전개된 사실을 이미지로 구현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간도 문제에 대해서 당연히 다양한 견해와 논점들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주장이든 엄밀한 학술적 뒷받침이 없이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네티즌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동여지도와 고액권의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태도 그 자체에는 그 나름의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토문제로 예민한 관심사가 된 고지도와 지명


고지도가 대중들에게 각광을 받는 것은 아마도 지금처럼 영토문제가 논란이 되는 때일 것이다. 영토문제가 불거지면 언론들은 앞 다투어 고지도를 찾는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동해”, “조선해”, “우산도”, “독도”, “토문강”, “분계강”이라는 글씨를 찾는다. 이런 내용들을 담은 새로운 고지도라도 한 장 발견되었다 하면 당연히 대서특필감이다.


언론이 고지도가 아니라 그 안에 쓰인 특별한 지명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주의를 요한다. 언론은 마치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핀셋으로 미세한 물질들을 집어 올리듯, 고지도에서 지명을 뽑아낸다. 언론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학문공동체 내부에서도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기여하려는 역사학자는 반드시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그렇게 그 단어만을 뽑아내서 읽는 순간, 그 단어는 원래 그 지도가 말하려 했던 맥락과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읽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 대학원생들에게 사료를 읽히다가도 비슷한 문제를 발견한다. 한국 전근대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사료를 읽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아무리 많은 사료를 번역해 준다 해도 전문적인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 중 하나인 것이다.


선생이 성격이 깐깐하다고 생각하는지, 학생들은 비교적 성실하게 사료를 읽어온다. 정확히 떼어 읽고 해석하기 위해 학생들은 적지 않은 시간을 쓴다. 그러나 성실하게 사료를 읽는다고 해서 그 사료를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학생들의 해석이 만족스럽지 않게 느껴질 때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맥락적(contextual)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 글자나 단어에만 집착해서는 그 사료 전체의 흐름을 놓치고, 결국 문제가 되는 대목의 해석도 부정확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 어떤 단어가 있다고 하자. 이 단어를 핀셋으로 뽑아내어 자기가 말하고 싶은 맥락 속에 집어넣는 것보다는, 그 사료 전체의 맥락과 흐름 속에서 이 단어가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까. 나는 학생들에게 늘 이런 잔소리를 한다.


옛 사료와 지도는 맥락에 맞게 읽어야


그런 점에서 보면 대동여지도 역시 맥락적으로 독해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지도를 만든 사람의 의도와 문제의식을 읽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은 김정호였다. 그는 시대와 역사에 대해 책임을 느끼던 중인들  중 한사람이었다.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한반도 해안으로 이양선이 출몰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의 지도가 유사시 조선의 방어를 위해 쓰이기를 희망했다.


김정호의 문제의식과 1860년대의 시대상황은 그런 것이었다. 따라서 안용복 사건 이후 고양되었던 우산도에 대한 영토의식이나 정계비 설치 이후 확산되어 왔던 북방영토의식이 대동여지도에 투영될 여지는 많지 않다. 대동여지도는 1860년대, 김정호라는 맥락 위에 있는 지도라는 점, 국민국가의 영토관념에 따라 만들어진 지도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명의 유무를 따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데 대동여지도를 맥락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논리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되돌아본다. 내가 그렇게 대동여지도를 맥락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지금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맥락적이지 못한 사료 해석은 객관적이지 못한 단어들을 남발하는 것만큼이나 인문학적이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도대체 전근대 한국역사를, 그것도 지도와 문화를 공부하면서 인문학적으로 현실과 소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 가능하다면 나 나름대로 그 답에 이르는 길을 탐색해보고 싶을 뿐이다.



글쓴이 / 배우성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저서 :『조선후기 국토관과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공저), 효형출판,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