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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선언한 대통령

이보규 2015. 5. 2. 16:53

 

 

 

대마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선언한 대통령

    소년시절 과거 준비하던 이승만
    '독도는 우리땅' 세계 알려

1. 이승만 대통령 대마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선언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한 당시 기사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하여 건국의 아버지로서 높이 평가 하는가 하면 친일인사들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노력을 기울인 독재 정치가로 악평도 한다. 1965년 그가 운명한지 이제 50년이 지나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때가 왔다. 그는 30세 때인 1904년 도미하여 1945년 환국할 때까지 오랫동안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친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일상생활을 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미국에 체류 중 내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아래 기사와 같이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요구를 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에는 평화선을 설정 선언했고 독도를 이 평화선 안에 넣어 한국 영토라고 세계에 선언하였다.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설정하지 않았으면 지금 독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2. 미국에서 한국 독립 승인 위해 노력했으나
소련과 공산당 방해로 실패



이승만은 소년시절 과거합격을 위해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배재학당에서 영
어와 신학문을 공부 해 미국의 민주주의를 동경했다. 그는 1899년 고종황제 제거 음모사건에 체포되어 한성감옥소에서 복역 중 1904넌 특사로 출옥 후 도미하여 미국에서 1945년 귀국할 때까지 독립운동을 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 후 이승만은 임정의 대일본 선전포고문을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전달하면서 임정과 한국독립 승인 그리고 항일 게릴라 군사훈련 지원 요청을 진지하게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이승만은 앞으로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해 친소 공산정권을 세울 것이므로 소련을 경계해야 한다고 미국정부에 강력 주장했다. 그럼에도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이 한반도를 소련에게 양도했다는 내용을 알게 된 이승만은 1945년 5월 유엔 창립총회에서 소련을 맹공격하였다.


이승만의 예측대로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북한을 점령하고 친소 공산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미국의 임정과 한국독립 승인 거부 배경에 공산주의자들의 방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던 이승만에게 소련과 공산당은 조국의 독립을 방해한 철저한 원수였고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미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였다.


소련은 이승만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결정했고 미국도 이승만은 다루기 힘든 식민지 독립운동가로 판단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대마도 등 실지(失地)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래는 이승만의 일생을 도표로 그린 것이다.


 


3. 이승만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선언, 침범하면 격퇴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역사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많으나 일본이 1905년 1월 근거도 없이 내각회의 결정으로 시네마 현에 편입시켜 다케시마라 명명하고 일본 영토라고 억지 주장해 왔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국에 있는 2차 세계대전 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준비과정 중 작성된 아래 좌측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되어 있다.



또한 1946년 연합군 최고사령부도 연합군 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를 통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 영토에 제주도 등 4개 섬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는데 독도가 빠졌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 3,000 개 이상의 섬이 있어 다 기록할 수 없어 대표적인 섬들의 이름만 명기한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된 연합국 지도(왼쪽)와 이승만의 대마도 등 실지회복 의지 기사.


위의 우측 신문 기사와 같이 실지 회복의지가 강해 일본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소식에 격분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발효일이 1952년 4월 28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발효일이 지나고 나서 우물쭈물하면 국제적으로 일본영토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로 전쟁을 하고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약소국 중의 하나여서 국제적으로 협상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통 큰 배짱이며 미국의 속내를 잘 읽고 국제 상황 분석에 천재인 이승만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직전인 1952년 1월 18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경계선 안에 넣는 해양주권 선을 아래 좌측과 같이 긋고 평화선이라 선언했다. 그리고 이 평화선 안에서 어업을 하려면 한국 정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고 어기면 처벌을 한다고 강력하게 선언했다.


1952년 설정한 평화선(왼쪽)과 1999년 신한일 어업협정 발효 이후.

 


일본은 당황한 것은 물론이고 팔팔 뛰며 항의했다. 한국 전쟁을 함께 수행하던 미국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취소를 요구했다. 일본은 이승만 대통령이 인접국들과 협의 없이 단독 일방적으로 만든 선이라 하여 이승만 라인이라 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전쟁 휴전에 강력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자극하면 휴전 협상이 어려워 질 것으로 판단하고 모른 채하여 결국 한국 편을 들어 준 것이 되었다.


그 결과 독도가 한국 땅으로 확실히 인정되었고 지금까지 실효 지배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99년 김대중 대통령 당시 발효된 신한일 어업협정에 따라 현재 독도는 위의 우측 그림과 같이 한일이 공동 관리하는 중간수역 안에 있게 되었다.



4. 이승만 평화선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일본이 지배하였을 수도 있어


한국전쟁 중 미국이 독도를 미군 폭격 훈련지에서 제외시킨 1952년 2월부터 일본인들이 침범해오고 동년 8월에는 아래 좌측 사진과 같이 불법 상륙해 일본 영토로 표시도 해놓았다. 그래서 1953년 4월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특무상사 홍순칠씨와 45명의 울릉도 청년들이 독도 의용수비대를 조직해 경비를 시작하고 일본 영토 표시를 완전 제거했다.

독도 의용수비대는 1954년 11월 독도에 불법 접근한 1,000톤 급 일본 순시선 3척과 항공기 1대와 전투 끝에 일본인 16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격퇴시킨 공적도 달성했다. 독도 의용수비대는 약 3년 8개월간 수비하다가 1956년 12월 한국 경찰에 경비 업무를 정식 인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평화선 설정 이후 이승만 정부는 이 평화선 안에서 조업하는 일본어선은 물론 중국 어선들도 모두 나포하여 처벌했다. 이 평화선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5년 한일조약 체결로 철폐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설정과 선언이 없었다면 일본이 경비대를 독도에 보내 지배하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독도와 관련된 이승만 대통령의 공적을 잘 모르고 있다.

지금 일본정부는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교과서에 싣고 전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해공군력이 막강한 일본군대가 독도를 침공할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한 한국 해군과 공군 전력의 대폭 증강이 매우 시급하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언은 물론 대마도 영토권 주장과 반환 요구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독도에 일본 다께시마라고 세운 표지판(왼쪽)과 좌측의 표지판을 없앤 독도 의용수비대.

옮겨온 글

 

 
대통령 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