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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2/2) 글쓴이 / 김종철

이보규 2009. 2. 6. 22:46


1. 말콤 엑스와 버락 오바마

 

케네디에서 존슨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획기적으로 성장한 흑인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는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2세였다. 모두 암살을 당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두 사람의 운동 노선과 이념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나는 이 책을 쓰려고 여러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넘는 말콤 엑스와 킹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아직도 활발함을 보고 놀랐다. 킹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1960년대 초를 전후로 미국과 국제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 급진적이었던 말콤 엑스를 광범위하게 다루는 웹사이트가 있다는 사실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오늘의 미국, 특히 흑인들의 현실과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두 지도자를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오바마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정반대 성향도 강한 말콤 엑스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


흑인운동에 열성적인 아버지와 백인의 피를 증오한 어머니


말콤 엑스의 원래 이름은 말콤 리틀(Malcolm Little)이었다. 1925년 5월 19일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그의 자서전 <말콤 엑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언젠가 어머니가 내게 이야기해준 바에 의하면,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던 어느 날 밤, 두건을 쓴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약칭 KKK단-남북전쟁 후 흑인 및 북부인을 폭력으로 억압하기 위해 남부 여러 주에 결성된 백인들의 비밀결사. 1871년에 불법화되었음-옮긴이) 단원 한 패거리가 말을 타고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시에 있는 우리 집에 쳐들어왔다. 그자들은 집을 포위하고 엽총과 소총을 휘두르며 아버지에게 나오라고 고함을 질러 댔다. 어머니가 앞문으로 나가서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임신 중임을 그자들이 똑똑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지금 혼자 꼬마 셋을 데리고 집에 있으며 아버지는 설교를 하러 밀워키에 출타중이라고 말했다. 클랜 단원들은 아버지가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 1887~1940. 자메이카 태생의 미국 흑인 지도자-옮긴이)의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라는 주장을 오마하의 ‘선량한’ 흑인들 사이에 퍼뜨리면서 ‘말썽을 일으키는’ 꼴을 ‘선량한 백인 기독교도들’이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으니 우리 가족이 마을에서 떠나는 게 좋을 거라고 어머니에게 큰소리로 협박 겸 경고를 했다. (이것이 알렉스 헤일리가 취재하여 구성한 <말콤 엑스>의 제1장 ‘악몽’의 첫 문단이다.)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자주 본 공포의 단체 KKK,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빼꼼히 드러낸 채 말을 타고 총칼을 휘두르면서 흑인들과 인권운동자들의 집에 불을 지르거나 린치를 가하는 자들. 말콤 엑스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들의 끔찍한 행태가 장차 자기가 맞서야 할 인종주의자들의 본질임을 예감이나 했을까?


이 책의 두 번째 문단은 말콤의 아버지가 1917년이라는, 미국 흑인운동의 암흑기에 얼마나 과감하게 진취적으로 살고 싸웠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의 아버지, 얼 리틀(Earl Little) 목사는 침례교회 순회목사인 동시에 마커스 오렐리어스 가비가 세운 세계흑인개선협회(UNIA)의 열성적인 조직담당자였다. 가비는 아버지와 같은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뉴욕시의 할렘에 있는 본부에서 흑인종 순수성의 기치를 치켜들고, 흑인 대중은 선조의 고국인 아프리카로 돌아가라고 열렬히 권고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가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말썽 많은 흑인이 되어 있었다. (<말콤 엑스> 상권, 22쪽)


말콤 엑스는 버락 오바마처럼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말콤의 어머니 루이즈 리틀(Louise Little, 처녀 적 이름은 루이자 노턴[Louisa Norton])은 엄밀하게 따지면 정상적인 결혼으로 태어난 백인이 아니었다. 말콤은 스코틀랜드계인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수치였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는 “내 안에 흐르는 백인 강간자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증오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진술로 미루어보면, 말콤 엑스의 어머니는 ‘순수한’ 백인 혈통으로 높은 지적 수준을 지녔던 버락 오바마의 어머니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말콤의 아버지는 키가 192센티미터나 되는 거한으로서 피부색은 아주 까맣고, 외눈박이였다. 말콤은 아버지가 한 눈을 잃은 까닭을 모른다고 했는데, 어쨌든 아버지는 조지아주에서 태어나 학교 교육이라고는 3,4년밖에 못 받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형제 여섯 명 중에서 셋이 백인에게 살해되고, 다른 한 사람은 린치를 당해 죽었다. 바로 그것이 얼 리틀이 목숨을 걸고 흑인 사이에 ‘아프리카로 돌아가자’ 라는 철학을 전파하기로 결심한 동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버지마저도 의문의 비명횡사를 하게 된다.


아버지는 피부색이 가장 연한 말콤을 편애


말콤 엑스는 ‘깨어 있는 흑인’이었던 아버지조차도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심이 아주 강했다고 회상했다. 말콤은 일곱 번째 자식이었는데, 아버지는 남매들 중에서 피부색이 가장 연한 말콤을 편애했다. 말콤이 어머니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받은 ‘물라토’(mulato, 중남아메리카의 혼혈 가운데 백인과 흑인의 제1대 혼혈아를 가리키는 말. 머리칼은 흑인을 닮아 곱슬머리지만 피부는 밝은 갈색부터 암갈색까지 다양하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말콤 엑스 공식 웹사이트>(THE OFFICIAL WEB SITE OF MALCOLM X)에 실린 그의 40대 시절 사진들을 보면서 ‘안경을 벗고 턱수염만 깎는다면 오바마하고 참 많이도 닮았겠다’고 생각했다. 훤칠한 키에, 흑인으로는 ‘백인적 요소’가 강한 이목구비, 곱슬머리, ‘순 아프리카계 흑인’보다 훨씬 밝은 피부…. 그렇다면 오바마도 어린 시절에 ‘물라토’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까?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소재가 아니라 미국사회에서 외모와 피부색이 청소년의 정신적 성장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시 얼 리틀 목사로 돌아가 보자. KKK단을 비롯한 백인 인종주의자들과 흑인을 억압하는 세력에 쫓겨 미국 이곳저곳으로 이사하면서도 ‘흑인의 아프리카 귀환’ 운동에 열성적이던 그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1931년에 얼 리틀은 (미시건주) 랜싱에서 전차에 치었다. 당국은 그가 사고로 죽었다고 판정했다. (···) 말콤 엑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흑인사회는 그의 사인에 대해 논박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그룹인 ‘검은 군단’(Black Legion)의 괴롭힘을 자주 당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 그룹이 1929년에 그들의 집을 태웠다고 비난했다는 것이었다. 어떤 흑인들은 검은 군단이 얼 리틀을 죽였다고 믿었다. 어떻게 얼 리틀이 ‘자기 머리를 강타하고 전차 선로에 가서 치어 죽을 수 있겠느냐’면서. (<위키피디어>, 말콤 엑스 항목 중 ‘초년기’에서)


말콤 엑스가 나중에 갖은 범죄와 타락의 수렁에 빠져 헤매다가 미국 흑인과 세계 아프리카인들의 단결과 자립을 위한 운동의 강력한 지도자로 태어났을 때, 그는 알렉스 헤일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버지의 두개골은 한쪽이 으스러져 있었다고 한다. (···) 아버지의 몸뚱이는 거의 두 동강이 나버렸다. (<말콤 엑스> 상권, 35 쪽)


어린 시절에 집이 불길에 휩싸이고, 이복까지 열 명이 넘는 남매들이 가난과 핍박을 당하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까지 겪은 말콤 엑스가 그 모든 공포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흑인 해방의 투사로 태어난 것은 불가사의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과정은 뒤에서 다시 보겠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존재로서,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가?


  아버지는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케냐의 루오족 출신으로 알레고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빅토리아 호 주변이었다. 마을은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아버지는 뛰어난 농부였고 마을의 원로이자 의사였다. 나에게는 또 한 명의 할아버지이고, 함자는 후세인 온양고 오바마이다. 아버지는 염소를 치며 영국 식민지 정부가 세운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장래성을 보였고, 마침내 장학금을 받으며 나이로비에 유학했다. 그리고 케냐가 독립하기 전날, 아버지는 케냐의 지도자들과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선발되어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의 기술을 배워 새롭고 현대적인 아프리카 건설에 기여하게 한다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대규모로 외국에 파견한 아프리카인 1세대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던 것이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 버락 오바마 지음,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년 7월. 39쪽)


말콤 엑스는 ‘흑인의 정체성’을, 오바마는 ‘미국의 통합’을


오바마가 2008년 6월에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되기 오래 전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순 아프리카인’이었고, 그의 조상은 백인들 밑에서 종살이를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어머니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미국 흑인사회에서는 오바마의 ‘흑인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흑인들의 압도적 지지가 필요했던 오바마에게 이것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과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바마는 이런 의문을 극복하고, 흑인 대중의 지지를 많이 받던 힐러리 클린턴을 압도하고 대통령후보로 확정되었다.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예비선거뿐 아니라 본선에서도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흑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지 않고 ‘미국의 통합’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유권자들이 21세기의 첫 10년이 오기도 전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뽑으리라고는, 오바마가 2007년 2월 10일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하기 전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예상을 뒤엎고 ‘오바마 대통령’을 만들어낸 그 자신과 선거캠프, 그리고 민주당의 전략에 관해서는 뒤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오바마에 비하면 말콤 엑스는, 어머니가 백인의 강간으로 태어난 ‘백인’이었다는 사실 말고는 철저히 흑인의 정체성을 가졌고, 흑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목숨을 바친 사람이었다.


말콤은 중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8학년(우리나라의 중학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해버렸다. 어느 날 백인인 영어선생과 나눈 대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말콤, 너도 장래 직업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니?”

  사실 나는 생각도 안 해보았었다. 그런데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네, 생각해봤습니다, 선생님. 변호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 당시 랜싱에는 분명 흑인 변호사가 -의사도 물론-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내가 그런 야망을 품도록 인상을 심어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실제로 확실히 아는 것은 변호사가 나처럼 접시를 닦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오스트로우스키씨는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두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가서 깍지를 꼈다. 그는 어렴풋이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말콤, 인생에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건 현실적인 자세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마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너를 좋아한다는 건 너도 알 거야. 하지만 넌 깜둥이라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알아야 해. 너는 네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너는 물건 만드는 손재주가 좋지. 모두들 목수 솜씨를 높이 쳐준다. 왜 목수일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니? 사람들이 인간적으로는 너를 좋아하니까 일거리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거야.” (<말콤 엑스> 상권, 75쪽)


이 짧은 대화가 말콤 엑스의 정규교육을 끝내버리는 ‘도끼질’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어머니는 인사불성 상태로 병원에 갇혀 살고, 남매들은 풍비박산이 된 채, 소년원 생활을 하던 그는 8학년이 끝나는 날 학교를 그만두고 이복누나인 엘라가 사는 동부 매사추세츠의 보스턴으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탄다.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말콤, ‘막장 인생’의 길로


보스턴에서 말콤이 구한 첫 직업은 나이트클럽의 구두닦이였다. 그는 ‘밤의 세계’에 살면서 출세한 흑인들이 백인 흉내내기를 하는 것을 날마다 보면서 그것을 따라한다. 콩크’(conk-곱슬머리를 약물로 풀어 백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가 그 대표적인 보기였다. 그는 보스턴과 뉴욕을 오가는 열차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고 접시닦이도 하다가 27세 때인 1943년에 뉴욕시의 할렘으로 ‘진출’한다. 할렘은 세계 최대 도시인 뉴욕의 흑인 빈민가로서 범죄와 타락의 소굴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 밀매, 도박, 사기와 공갈, 강도, 뚜쟁이 같은 ‘막장 인생’의 거의 모든 분야를 경험한다.


1945년 말 다시 보스턴으로 간 말콤은 패거리들과 함께, 부유한 백인 주택들을 털다가 이듬해 1월에 체포되어 8년 징역을 선고받고 매사추세츠주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의 자서전을 이 대목까지 읽어보면 동서양에서 나온 어떤 소설에 못지않게 범죄 경력이 화려하고 다양하다. 나중에 흑인사회뿐 아니라 아프리카 민중운동 진영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가 된 인물의 과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감옥에서 말콤 엑스의 별명은 ‘사탄’이었다. 그가 종교를 적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옥살이 하면서 만난 ‘빔비’라는 흑인(독학으로 상당한 지식을 쌓은 무신론자)의 권유에 따라 ‘영어통신 코스’를 시작하고 ‘라틴어 통신강좌’까지 받으면서 말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것이 그에게 찾아온 ‘작은 구원’이었다. 그는 ‘게걸스러운’ 독서광이 되어 감방의 불이 꺼진 뒤에도 복도에서 스며드는 불빛으로 새벽까지 책을 읽곤 했다.


1948년에 말콤 엑스에게 생애 최대의 ‘구원’이 찾아온다(이것이 나중에 그가 암살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고 추정되기는 하지만). 그의 형 필버트가 ‘이슬람 국가’(Nation of Islam, 약칭 NOI)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낸 데서 그 구원은 시작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말콤의 여러 남매 중 손아래인 레지날드는 가장 열성적인 ‘전도사’였다. “형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담배를 끊으면 감옥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려 줄께”라는 그의 글을 보고 흥미를 느낀 말콤은 노포크 교도부락에서 옥살이 하던 기간 내내, ‘검은 이슬람교도들’(Black Muslims)의 지도자인 일라이자 무하마드(Elijah Muhammad, 1897~1975)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독서와 이슬람으로 다시 태어난 말콤 엑스


일라이자 무하마드는 미국 흑인운동사에서 긍정과 부정 양면으로 아주 중요한(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마틴 루터 킹처럼) 인물이므로 여기서 간략히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조지아주 샌더스빌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일라이자 풀(Poole)이었다. 그는 말콤 엑스와 그 유명한 프로복서 무하마드 알리(원래 이름은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 그리고 루이 패러칸(Louis Farrakanh, 1933년생. 말콤 엑스의 영향을 받아 NOI에 들어가서 그의 부목사로 일하다가 말콤이 탈퇴한 뒤  NOI의 초대 대변인이 됨)의 종교적 스승이자 삶의 지표였다. 그는 침례교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성인이 되자 미국 최초의 이슬람 단체에 들어가서 잠시 활동하다가 1934년에 NOI를 창시한 뒤 급격히 교세를 넓혀 강력한 흑인 지도자가 되었다.


1952년 가석방으로 출옥한 말콤 엑스는 디트로이트의 이슬람 제1사원에서 ‘위대한 스승’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만난다.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죄수인 나에게 시간을 내어 편지를 써준 그 위대한 알라신의 사도를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우리 흑인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그의 생애를 고통과 희생으로 보낸 사람이라고 내가 들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말을 시작하자 나는 그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말콤 엑스> 상권, 319쪽)

 

무하마드를 만나서 설교를 듣고 대화를 하면서 말콤은 독실한 무슬림이 되어 성을 ‘엑스’(X)로 바꾼다. “리틀이란 이름을 가진 푸른 눈의 백인 악마가 그의 성을 나의 아버지쪽 선조에게 붙여준 것 대신에” 이슬람 민족의 성으로 엑스를 받았다는 것이다. 엑스는 노예인 흑인이 선조를 모른다는 의미였다.


일라이자 무하마드의 각별한 신임을 얻은 말콤은 ‘이슬람 국가’에서, 세속적으로 말하면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는 1953년 6월, 디트로이트에 있는 제1사원 부목사로 임명된 이래 보스턴 제1사원을 개설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한다. 그는 1959년 뉴욕에서 ‘증오가 낳은 증오’라는 제목으로 NOI에 관해 텔레비전 방송을 한 것을 계기로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당연히, 미국 주류사회와 보수세력은 ‘백인은 악마’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말콤을 미국을 전복하려는 ‘불온분자’로 여기게 된다. 연방수사국(FBI)이 그를 도청하고 미행했음은 물론이다.


말콤이 1952년 NOI에 가입했을 때 5백여 명에 불과하던 신도가 그가 탈퇴하기 전인 1963년까지 2만5천여 명으로 늘어난 데는 그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미국 이슬람운동에서 일라이자 무하마드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백인 배척하던 말콤, 메카 순례 이후 우애와 평화공존을


그러나 마침내 말콤이 무하마드와 결별하고 NOI를 떠나는 시간이 온다. 1963년 11월 대통령 케네디가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당하자 언론의 논평 요구를 받은 말콤이 ‘자업자득’이라고 대답한 것이 무하마드를 격분시켰다. 무하마드는 말콤에게 6개월 자격정지를 명한다. 결별의 더 결정적인 원인은 무하마드의 간음과 사생아였다. ‘무하마드가 개인 비서들과 간통해서 잇따라 임신하게 했다’는 교단 안의 소문을 믿으려 들지 않던 말콤은 오랜 번민 끝에 당사자들을 만나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받고 ‘이슬람 국가’를 떠난다. 이밖에도 그가 무하마드와 결별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세계적 스타’가 된 말콤에 대한 무하마드 자신과 교단 간부들의 질시와 모함이었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열중했던 ‘이슬람 민족’ 운동을 떠난 말콤 엑스는 말할 수 없는 고뇌에 빠져 있다가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하지’(순례)를 떠난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여러 인종의 무슬림들과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백인은 악마’라는 고정관념을 떨쳐버린다.


  여기 이 고대의 성지, 아브라함과 마호멧 및 성서에 나오는 그밖의 모든 선지자들의 고향에서 피부색과 종족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것만큼 진지한 환대와 참된 형제애의 정신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지난 주일 동안 내내 나는 ‘온갖 피부색의 사람들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친절을 목격하고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넋을 잃을 정도였다. (<말콤 엑스> 하권, 207쪽)


그는 이때부터 수니파(시아파와 함께 이슬람의 양대 교파)로 개종하면서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라는 아랍식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한다.


말콤은 메카 순례 이후 행동반경을 넓혀,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흑인의 단결과 우애, 모든 인종의 평화공존을 강조한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o-American Unity, 약칭 OAAU)의 의장으로서 아프리카 단결기구(OAU)와 연대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아직까지 의혹인 비극적 암살, 제발 다시는 없길


마침내 운명의 날이 온다. 1965년 2월 21일 말콤 엑스는 뉴욕 맨해튼의 오듀번 볼룸에서 열린 OAAU의 모임에서 연설하고 있었다.


  “(···) 앞줄의 사나이 세 명이 벌떡 일어서서 말콤 엑스를 겨냥하고 일시에 총을 쏘아댔어요. 그것은 마치 총살집행장면 같았어요.”

  말콤 엑스는 그를 명중시킨 열여섯 발의 총알 중 첫 알을 맞는 순간 한 손이 가슴 위로 내려졌다. 다음 순간 다른 한 손이 위로 치켜 올려졌다. 그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은 총탄에 아스라졌으며 그의 턱수염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는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의 거대한 몸집이 뻣뻣하게 뒤로 넘어지며 의자 둘을 쓰러뜨렸다. (<말콤 엑스> 하권, 351쪽)


미국 경찰은 ‘검은 이슬람교도’ 세 명을 체포했는데, 당연히 ‘1급살인’으로 사형을 당했어야 마땅한 그들은 20여년 남짓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났다. 그러나 말콤 엑스의 사후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국가 정보기관이 암살에 간여했으리라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장면을 다시 읽으면서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암살당한 백범 김구 선생과 몽양 여운형 선생을 연상했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도 생각났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2008년 미국 민주당 에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이기기를 은근히 바랐다. 부시를 반드시 눌러야 세계가 훨씬 더 편안해질 텐데, 오바마가 후보가 되면 인종주의자들과 극우보수세력의 암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들 부시가 임기 8년 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숨을 잃게 한 그 많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부시의 길을 따를 가능성이 큰 존 매케인의 당선은 막아야 할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2000년에 앨 고어가, 2004년에 존 켈리가 패배함으로써 미국에는 끔찍한 역사의 퇴행이 나타났다. 한반도에서는 더 앞당겨질 수도 있었던 북한의 개방이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같은 보수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극우에 가까운 보수가 집권하면 그토록 파괴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과 세계 양심세력의 기대에 맞게 대통령이 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가 말콤 엑스처럼 무방비 상태로 비극적 최후를 맞지 않고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면서 4년, 또는 연임한다면 8년 임기를 무사히 마치기를 바랄 뿐이다.


말콤 엑스가 암살당한 1965년에 오바마는 네 살이었다. 그러니 그가 말콤의 죽음을 알았을 리가 없다.

 

검은 피부 때문에 오바마도


오바마의 첫번째 저서이자 자서전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보면 그는 말콤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검은 피부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인종 차별을 괴로워하면서 방황과 탈선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마약중독자, 뽕쟁이. 흑인 청년인 내가 가고자 하는 최종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기착지가 그것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녀석이었는지 증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내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들과 내 마음속 풍경들을 지워버리고 또 내 기억의 못난 것들을 지워버릴 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술에 취한다는 것이 백인 친구의 반짝이는 새 자동차 안에서, 혹은 학교 땡땡이치고 나와 말썽 일으킬 게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하와이 원주민 아이들 몇몇과 해변에 앉아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과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위의 책, 174~5쪽)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술과 마리화나에 빠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마약인 카페인이나 헤로인에는 손을 대지 않고 인생 초년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오바마가 그렇게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에게 확실한 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지성과 진취성을 아울러 갖춘 어머니가 방황하는 아들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옥시덴탈 칼리지에 진학시킴으로써 그는 흑인청년으로서는 쉽지 않은 엘리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말콤 엑스가 중학교 2년을 마치고 범죄와 방탕의 수렁으로 떨어진 것과는 정반대이다.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며 위기 극복한 오바마


오바마의 더 확실한 뿌리는, 비록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하버드대에서 공부하는 길을 택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모국인 케냐로 돌아가서 공직생활을 한 아버지였다.


옥시덴탈 칼리지 2학년을 마친 오바마는 뉴욕시의 콜럼비아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미국 뉴잉글랜드의 아이비리그 8개 대학 중 한 곳에 들어간 것이다. 지금도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입학하려고 한다는 바로 그 대학에. 대학을 마치고 시카고의 빈민지역에서 일하던 오바마는 법률전문가가 될 필요를 느끼고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 지원해서 합격한다. 피부가 희지 않고 앵글로색슨족이 아니라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와스프에 못지않은 엘리트의 요건을 갖춘 것이다.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에 케냐를 방문한다. 그때는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아버지인 버락 오바마 1세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큰 집과 큰 차를 갖고 풍족한 생활을 하다가 관광부 장관이 되었으나 조모 케냐타 대통령과의 불화 때문에 해임당하고 ‘백수’가 된다. 빈민가의 허름한 집에 살다가 케냐타가 죽은 뒤 재무부장관이 된 아버지는 그 자리를 물러난 뒤 마지막 몇 해를 비통함과 후회 속에 살았다고 한다.


  오바마는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 또한 아홉 살에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으며 10대 시절에는 그 아버지의 난폭한 성격 때문에 피나도록 맞고 버려졌음을 알게 되었다.

  (·····)

  그렇게 무덤 옆에 서서 오바마는 자기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알고 이해했다고, 그리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담하게도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꿈과 희망-버락 오바마의 삶>, 스티브 도허티 지음, 김혜영 옮김, 2008년 3월, 송정문화사, 151, 153쪽)


오바마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대통령후보로 나서면서 ‘버락 후세인 오바마’라는 이름이 득표에 불리함을 알면서도 고수하는 동기가 되었다.


오바마, 고교시절쯤 말콤 엑스 자서전을 읽어


오바마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인 것 같다. 그는 ‘흑인은 왜 차별을 당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시절에 관해 이렇게 썼다.


  말콤 엑스만이 포기하지 않은 듯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포기한 곳에서, (···) 오바마는 말콤이 구원으로 가는 자신만의 길을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말콤마저도 그의 깊고 깊은 고통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할 수 없었고, 그의 찢어진 상처를 치료해줄 수 없었다. “그는 그가 한때 가졌던 바람, 그 안에 흐르는 흰색 피, 폭력행위(강간)에 의해 얼마간 닦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에 관해 이야기했다.” (위의 책, 116쪽)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오바마가, 말콤이 ‘이슬람 국가’를 탈퇴하고 ‘백인은 악마’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미국 흑인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인들의 화합과 단결을 위한 지도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오바마가 직접 쓴 책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는 말콤 엑스에 관한 내용이 간략하게 나올 뿐이다. 그는 시카고에서 흑인 빈민들을 위해 일하던 시절 루이 패러칸(일라이자 무하마드의 후계자)이 이끄는 ‘이슬람 연합’이 흑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독선과 세속적 천박함과 상업주의에 빠진 것을 보고 실망하던 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말콤 엑스의 손에서는 혁명적이었던 것, 예컨대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이, 말콤 엑스가 뿌리를 뽑자고 힘주어 외쳤던 바로 그 대상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환상, 또 하나의 위선이 생겨난 것이었다. 행동에 나설 수 있는 또 하나의 핑계가 생긴 것이었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341~2쪽)


오바마가 서른네 살에 초판을 낸 이 책에서 말콤 엑스를 ‘백인 배척주의자’ ‘실패한 혁명가’로 판정한 시각은 그 뒤에도 바뀐 것 같지 않다. 오바마가 연방 상원의원 시절인 2006년에 낸 두 번째 저서 <버락 오바마-담대한 희망>(홍수원 옮김, 2007년 7월, 랜덤하우스코리아)에는 말콤 엑스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