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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 난타-두드림은 멈추지 않는다.

이보규 2009. 4. 25. 06:59

“안녕하십니까, 어서오세요.”
광화문에서 강남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는 새로운 난타 전용관 오픈을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요즘이다.
“5월 1일 코엑스 아티움에 난타 전용 극장을 오픈합니다. 단순히 <난타> 작품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손색없는 강남의 명물로 만들고 싶은 포부가 큽니다.”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PMC프로덕션은 퍼포먼스(Performance), 뮤지컬(Musical), 시네마(Cinema)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종합엔터테인먼트 회사이다. 이제 PMC프로덕션은 공연 업계에서 최초의 벤처기업이자 성공적인 운영으로 성장을 거듭하는 롤모델이 됐다. 해외 시장으로 우리 문화를 마케팅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난타>도 없었다.

배우에서 제작자가 되기까지
송승환 대표는 사실 연기를 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 제작자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었다.
“연기 활동을 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공연 제작도 겸해왔습니다. 본격적으로는 1985년부터 4년간 뉴욕으로 유학을 다녀와서부터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을 시작했지요.”
아역 배우로 시작한 그는 대학을 가기 위해 잠정적 연기 활동을 중단하고,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이 때 학과 선택을 하면서 계속 배우의 길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그는 이제까지의 활동을 철없던 시절의 취미생활로 여기고 평범하게 살 것을 택한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배우의 ‘끼’는 어찌 할 수 없었는가 보다. 전공보다는 오히려 연극반 활동에 치중하게 됐고, 결국 연기는 천직이라는 소명의식의 꿈틀거림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극단에 입단한 것이다. 밤낮 할 것 없이 연극에 한껏 심취했고, <루브>라는 작품으로 연극 제작과 연출가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연극을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TV 출연도 마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얻은 인기가 그를 스타로 만들었고, 많은 영화까지 섭렵하는 등 거침없는 연기에 물이 올랐다. 송 대표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연극 <에쿠우스>라는 작품의 2대 주인공으로 캐스팅 돼 연기상을 거머쥐기까지 했으니 그의 재능은 이미 검증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던 중 해외 촬영을 하면서 외국을 오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서 견문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은 무모한(?)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말로만 들어오던 뮤지컬의 본고장에서 뮤지컬을 접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돼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한창 잘나가는 때에 돌연 유학이라니, 그 당시 주변에서는 엄청난 만류가 이어졌다. 경제적으로 부모님 사업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경제적 허탈감과 함께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증이 증폭됐다. 오히려 홀가분하게 유학 길에 오를 수 있었다고 그는 덤덤하게 말한다.
“뉴욕에 머물렀던 시절은 1980년대 입니다. 무엇보다 문화의 다양성에 쇼크를 받았어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공연의 장르는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더군요. 다양한 문화와 장르가 공존하는 것에 문화적 쇼크를 받았고, 그게 저를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이 됐습니다.”
이후 ‘환퍼포먼스’라는 프로듀서 시스템 개념의 극단을 운영하게 된다. 사실 환퍼포먼스의 시작도 참 초라하다. 광고 기획사를 하는 선배의 사무실 한 켠에 자리를 잡은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양한 콘서트 기획과 음반 제작으로 자본을 축적하게 됐고, 회심의 역작인 <고래사냥>을 만들기에 이른다. 순수창작 뮤지컬을 만들겠노라 큰소리를 쳤고, 7억원이라는 제작비를 들여 완성했다. 당시 뮤지컬 제작에 7억원의 비용을 들인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위험한 투자였다. 1년 동안 밤잠을 설치며 준비에 고스란히 매달릴 수 있었던 열정,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재미’에 푹 빠져 즐거운 고생에 중독된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기를 기다리다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뒤 재보지 않고 무작정 덤볐다가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저는 후자 쪽에 더 무게를 실어주고 싶습니다. 꿈을 포기한 삶은 슬퍼요. 망할 때 망하더라도 마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달려가 부딪혀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벽에 부닥쳐 울지라도 온몸으로 충격을 느껴봐야 살아있는 삶이지요. 조금 더 편하고 순탄한 길을 선택하느라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한다면 아마 평생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겁니다.”
송 대표는 배우와 제작자를 겸하는 것에 실질적인 한계를 느꼈다. 자본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하는 극단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과 이윤을 남기기 위한 두 집단과의 화합은 얼핏 보기에도 기름과 물과 같은 관계. 이것을 하나로 묶는 과제가 시급했다.
극단 대표가 자본 확보를 위해 영업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지, 매번 작품 때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작품의 질 또한 보증하기 힘들다. 또 우수한 인재들을 스카우트하고 키워내는 일을 유지하는 것도 되지 않는다. 주먹구구로 관리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아예 경영 전반을 관리할 믿을만한 전문 경영인이 필요했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풀렸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총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던 친구가 찾아와 우연히 식사를 했고, 식사 후 그 친구가 돈을 빌려주었다. 한참 전에 빌려달라고 했던 부탁을 송 대표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알아서 찾아와 준 것이다. 이것이 든든한 동반자이자 현재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이광호 대표와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경영학을 전공한 이 대표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이미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경영 전문가와 손을 잡으면 분명한 시너지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송 대표는 공연 기획과 제작을, 이 대표는 전반적인 회사 운영을 책임지는 등 역할을 분담해 공동 대표로서 PMC프로덕션이 설립됐던 것이다.
“제가 전문 경영을 맡고 있지는 않지만 핵심 비전은 명확합니다. 우리 회사는 물건이 아니라 공연이라는 작품을 만드는 곳입니다. 감성이 매우 중요하지요. 그 감성을 채워줄 수 있는 단기 목표들을 세워 하나하나 이뤄가고, 그러다 보면 장기적인 비전을 이뤄가는 데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원칙을 기반으로 직원 모두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발상의 전환,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다
PMC프로덕션의 효자 노릇을 하는 <난타>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
아직 보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난타> 줄거리에 관해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배경은 주방, 네 명의 요리사가 등장해 급히 결혼 피로연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중심으로 칼, 도마, 냄비, 프라이팬, 접시 등 온갖 주방기구와 일상 용품을 가지고 사물놀이 장단처럼 두드리며 극이 이뤄진다. 술병과 잔을 수없이 던지고 받는 칵테일쇼, 불쇼 등이 기막힌 묘기가 돼 펼쳐진다. 배추, 오이, 도마, 물통으로 난장판이 되는 주방에서 신명 나는 잔치 한마당이 펼쳐진다. 물통과 북으로 만든 오고, 커다란 들통을 드럼처럼 만들어서 신나게 난타한다. 네 명의 요리사가 호흡을 맞춰가는 과정을 아주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게 그려놓았다.
그런데 왜 하필, <난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