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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낯선 시 형식을 통한 현실 드러내기

이보규 2008. 7. 16. 05:41

 

 

 

          낯선 시 형식을 통한 현실 드러내기
                             - 브레히트와 황지우의 시의 기법을 중심으로


                                                                                                                               김길웅(서울대 강사)


I. 머리말

이 글에서는 <낯선 시 형식을 통한 현실 드러내기> 기법을 중심으로 브레히트 Bertolt Brecht(1898-1956)의 문학(관)과 황지우(1952- )의 시(론)를 비교.검토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브레히트의 소격과 변증법 개념을 살펴보고, 이어 이를 토대로 황지우의 시론과 브레히트의 문학관의 유사점을 밝힌다. 그리고 황지우의 초기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와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5) 가운데 주목을 끄는 시 몇 편을 선택하여 브레히트의 시와 비교함으로써, 논의를 구체화하고자 한다.

브레히트와 황지우를 비교할 수 있는 근거는, ① 이 두 작가 모두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며, 문학을 통해 시대의 금기사항들을 드러내려 했다는 사실, ② 이를 위해 두 사람 모두 지식인으로서 형식주의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문학에 다양한 기법을 동원하며 이를 <소격Verfremdung>이라는 개념으로 불렀다는 점, ③ 따라서 이들의 시가 전통적인 서정시 개념을 뛰어넘는 '낯선 시 형식'을 보여 준다는 데에 있다.

두 작가의 시가 기법 상 많은 닮은 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념, 내용상의 유사성까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이 두 시인이 살았던 시기는 50여년 이상의 시간적인 거리가 있고, 사회체제 내지는 이념상의 지향점이 서로 달랐으며, 황지우 스스로 "나는 시를 쓰면서 나중에야 이것이 브레히트가 연극에서 시도했었던 '소격효과 Verfremdungseffekt'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듯이, 황지우가 의도적으로 브레히트를 수용했음을 인정할 자료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기법 위주의 분석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힌다.


II. 인식론적 개념으로서의 소격과 변증법

소격이라는 개념이 브레히트 문학의 중심범주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개념은 크게 ①형식-미학적 개념으로, ②변증법적 인식론의 범주로 연구되어 왔다. ①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구자들은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브레히트의 영향관계를 논하며, 구체적으로 브레히트 문학에 소격의 기법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그 결과 극중극, 개막사와 폐막사, 논평, 관객에게 말 걸기, 노래, 장면제목과 전개될 내용요약 및 先提示, 급격한 장면의 변화 등의 범주들이 밝혀졌다. ②의 관점은 뮐러 K.-D. M ller, 마이어 H. Mayer, 슈타인벡 R. Steinweg, 브뤼게만 H. Br ggemann, 크노프 J. Knopf 등의 연구자에 의해 60년대 후반, 독일 학생운동의 여파로 브레히트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가 새롭게 조명됨으로써 발전되었다.

브레히트의 경우 때와 장소에 따라, 동일한 개념을 비체계적이고 산발적으로 여러 의미로 사용하는 현상은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소격의 개념도 예외가 아닌데, 브레히트는 [놋쇠 구입 Der Messingkauf]이나 [연극론 소책자 Kleines Organon f r das Theater]에서는 소격 개념을 주로 예술 기법으로 설명하다가도 변증법과 관련된 부분에 이르면 인식론적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혼선은 소격(효과)을 야기하는 기법과, 그 기법이 추구하는 목적을 분리해 보면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한다.

"소격을 야기하는 묘사란,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되, 동시에 대상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Eine verfremdende Abbildung ist eine solche, die den Gegenstand zwar erkennen, ihn aber doch zugleich fremd erscheinen l t."

여기서 말하는 대상의 인식은 소격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를 위한 전제로서 "동시에 대상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 것"은 위에 열거한 소격의 제 기법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소격이 대상(혹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매개한다고 해서 결론까지 직접 전달하지는 않는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했던 것은 독자(관객) 스스로 생각에 잠기고 결론을 내리게 유도하는 것이었다. 즉 대상의 인식은 독자 스스로의 몫으로 남고 브레히트의 문학은 이에 이르는 수단을 제공하는 데 그칠 뿐이다. "세계의 수수께끼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제시된다 die Weltr tsel werden nicht gel st, sondern gezeigt"는 브레히트의 말처럼 이 작가의 미학 체계를 볼 때, 결론까지 제시한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하나의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인식은 발견된 이외의 곳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서, 서사극을 관람함으로써 혹은 교육극을 연기함으로써 <사고의 기술 Denktechnik>을 훈련한 사람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서사극 나아가서는 브레히트의 미학 체계는 이러한 사고 방식 내지는 <사고훈련 Denk bung>을 통해 현실에 내재한 모순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자세를 길러주는 데 주안점이 두어진다.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자세는 "생산적인 자세 produktive Haltung"인데, 소격과 관련하여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격효과를 야기하는 이 기법의 목표는 관객에게 연기할 사건에 대해 탐구하는 듯한, 비판적인 자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수단이 예술적이었다.
Der Zweck dieser Technik des Verfremdungseffekts war es, dem Zuschauer eine untersuchende, kritische Haltung gegen ber dem darzustellenden Vorgang zu verleihen. Die Mittel waren k nstlerische."

소격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실 인식이고, 이를 위한 비판적인 자세의 습득을 브레히트는 여러 소격의 예술적 기법을 통해 매개하려함이 밝혀진 셈이다.

브레히트는 "그 기교[=소격의 기교]는 연극에, 그것[=낯익은 것, 현실]을 모사하는 데에 새로운 사회과학의 방법론인 유물변증법을 활용하게 해준다"고 밝히며, "현실에 대한 인식이 문제가 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변증법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브레히트가 소격의 기교를 변증법적 방법론을 토대로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양 개념 사이의 관계는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바 있어서 여기서 이를 상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브레히트와 황지우의 시를 비교하기 위한 틀을 마련하기 위해 변증법과 소격의 관계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보고자 한다.

변증법의 커다란 세 범주는 <부정의 부정>, <양의 질로의 轉化>, <대립물의 상호침투>로 요약할 수 있다. [변증법과 소격 Dialektik und Verfremdung]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브레히트는 이 兩者가 연결될 수 있는 항목들을 모두 9개의 세목으로 정리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1)이해로서의 소격(이해-비이해-이해), 5)모순성, 8)모순의 일치라는 항목은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의 원리와 관련 있고, 브레히트 작품에서 정과 반의 대조로 나타난다. 2)이해가 들어설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집적(양과 질의 전화)과 6)하나의 사건을 이와는 다른 사건을 통해 이해하기라는 부분은 문학에 병렬 구조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7)도약이라는 항목은 의미의 비약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브레히트가 문학에 적용했다는 변증법은 편의상 정과 반의 대조, 병렬구조, 의미의 비약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III. 브레히트와 황지우의 시론

1. "세계는 모순의 신호들로 가득 차 있다"

"세계의 변화가능성은 그 모순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Die Ver nderbarkeit der Welt besteht auf ihrer Widerspr chlichkeit"는 브레히트의 견해와 유사하게, 황지우도 "세계는 모순의 신호들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는 무수히 많은 모순의 신호를 발산하고 있고, 황지우는 주로 시를 통해 이를 포착하려 한다. 물론 황지우의 시가 모순의 감지 자체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황지우가 모순의 신호를 감청하는 이유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기대, "즉 이 현실 말고 또 다른 현실이 있으리라는,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현실이 그 현실로 바꿔졌으면 좋겠다는 기대, 소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모순의 인식과 이를 통해 실천이 뒤따른다면, 그것이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되리라는 '기대, 소망'을 이 두 작가는 함께 나누고 있다. 따라서 황지우는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이 세계를 지금과 다르게 해석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사회상태를 과정으로 파악하고 그 모순성을 추적하여 "사회의 유동성 die Beweglichkeit der Gesellschaft"에 이를 수 있다는 브레히트의 믿음과 기본적으로 - 이론적으로는 - 동일한 세계관의 표현이다.

2. 徵候로서의 문학

비록 교육극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브레히트는 자신의 문학을 "정신운동선수를 위한 유연성을 기르는 훈련 Geschmeidigkeits bung f r Geistesathlet"이라고 밝힌 바 있다. 브레히트가 특정한 메시지나 결론을 제시하지 않고, 독자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더 선호했음은 "올바른 길 der richtige Weg"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올바르게 간다 das richtige Gehen"는 개념이 더 좋다는 브레히트의 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브레히트의 문학을 두고 <합의 단계가 생략된 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브레히트의 문학이 추구했던 일차적인 관심은 독자의 사고를 작동시켜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사고의 훈련 Denk bung>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문학관은 황지우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황지우는 이를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작가는 현실에 대한 진단까지 내릴 수는 없고, 그 징후만을 독자에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 징후를 예시받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그래서 독자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징후의 내적 의미를 '자발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황지우는 주장한다.

3. 소통/매스컴에 대한 강력한 항체

브레히트와 황지우가 이와 같은 동일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두 작가 모두 진실이 억압받는 어두운 시대를 살았다는 데에서 그 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가 살았던 시기는 주로 독일의 히틀러 시대와 동독이었고, 황지우가 시를 활발하게 발표했던 당시 이 땅에는 유신과 제5공화국의 암흑기였다.

황지우는 "문학이란 의사소통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것, 표현 못하게 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그것에의 도전으로부터 얻어진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황지우에게 문학이란 매스컴과 같은 "가짜 소통 장치"에 맞서는 무기가 된다.

"말할 수 없는 것들, 말해서는 안되는 금기 사항들이 많은 억압적인 사회에서 문학은 그래서 당대의 유언비어에 해당한다. 그런 사회일수록 매스컴은 대형화되고 특히 전파매체는 국가에 의해 독점되거나 직접 감독 하에 놓여 있게 된다. [...] 매스컴은 반(反) 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부끄럼 없이 말하는, 어떻게 보면 좀 무정할 정도로 정직한 의사 소통의 전형인 문학은 따라서, 진실을 알려야 할 상황을 무화(無化)시키고 있는 매스컴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존재한다."

브레히트 역시 히틀러의 선전 선동이나 동독의 관료적인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건설방식 모두 일종의 허위의식, 즉 이데올로기로서 비판의 대상이었고, 이를 효과적으로 분쇄하기 위한 방법론을 [진실을 쓸 때의 다섯 가지 어려움 F nf Schwierigkeiten beim Schreiben der Wahrheit], [진실의 회복에 관하여 ber die Wiederherstellung der Wahrheit]와 같은 글에서 상세하게 나열한 적이 있다. 이에 관해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겠지만, 정상적인 언로가 막히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곳에서 브레히트는 이를 교정하는 방법론을 찾기 위해 부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시와 지성

지적인 시를 통해 독자 스스로 논리적인 판단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시가 독자의 감성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해야 한다. 황지우는 "나는 아무리 의심해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理性)뿐이다. 내 시는 거기에 실핏줄을 대고 있다"고 밝혔다. 이 말은 황지우에게 시란 현실에 대한 진단이 아닌 징후로서, 독자들은 작가가 제시하는 징후들을 이성을 발휘하여 논리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요구와도 맞닿아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극을 설명하면서 전통극이 관객에게 "감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반면, 서사극은 이성 ratio에 기대를 걸고 "논증을 가지고 작업한다 es wird mit Argumenten gearbeitet"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브레히트의 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브레히트는 "시와 논리 Lyrik und Logik" 를 운위하며, "시인은 이성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Der Lyriker braucht die Vernunft nicht zu f rchten"고 말했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장미를 꺾어 보면 잎사귀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듯이, 시 역시 이성을 통해 논리적으로 하나하나의 인과관계를 살펴보기를 권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모형을 <모델 Modell>, <파라벨 Parabel>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보편화되어 있다. 원자의 구조와 작동상태를 한 눈에 보여주는 원자 모델이 실제의 원자는 아니면서, 실제의 원자가 보여줄 수 없는 원자의 본질까지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다. 따라서 원자 모델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이성과 논리, 추론 등을 동원하여 원자모델을 통해서 원자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황지우 역시 "시 속의 현실은 준(準)현실"이며, "시적 진술은 사실적 진술에 비해 그 지시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거기에 지시 기능이 있다"고 말한다. 이성을 발휘하여 시 속의 현실을 통해서 실제의 현실을 더듬어 찾아보는 것, 즉 시적 진술이 갖는 지시 기능을 따라 현실의 모습을 파악하는 일은 독자의 몫이 된다.

5. 시와 '시적인 것'

전통적으로 서정시 Lyrik라는 장르 개념은 헤겔 Hegel에서 비롯되어 슈타이거 E. Staiger에 이르는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는데, 그 요체는 서정시 내지는 서정성 lyrisch이란 정조 Stimmung를 통해 시인의 심혼을 표현하며, 따라서 거기에는 서정시와 시적 자아 사이에 아무런 거리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평론가들이 지적해온 대로, "지적 절제를 통해 긴장된 시적 공간을 구축"해온 황지우가 본격적인 禪詩 계열의 시들을 선보인 {나는 너다}, {게눈 속의 연꽃} 등이 나오기 이전, 그러니까 이 시인의 '낯선 시 형식'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와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에는 전통적인 서정시로 파악하기 어려운 실험시들이 등장한다.

황지우 시의 실험성은 주로 "신문의 일기예보나 해외 토픽, 비명(碑銘), 전보, 연보(年譜), 광고문안, 공소장, 예비군 통지서 등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토콜" 등이 시에 그대로 인용됨으로써 발생한다. 그가 이렇게 과감하게 서정시 형식을 파괴하는 이유를 황지우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포기와 "시적인 것"의 도입이라는 말로 설명한 바 있다.

"나는 시를 쓸 때,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바꿔 말해서 나는 비시(非詩)에 낮은 포복으로 접근한다. '시적인 것'은 '어느 때나, 어디에도' 있다. 물음표 하나에도 있고, 변을 보면서 읽는 신문의 심인란에도 있다. 풀잎, 깡통, 라면봉지, 콩나물을 싼 신문지, 못, 벽에 저린 오줌자국 등 땅에 버려진 무심한 사물들에까지 낮게 낮게 엎드려 다가가 나는 본다. 그것들의 관계를 나는 응시한다. 토큰을 들이미는데도 모르고 졸고 있는 아침 나절의 버스 안내양과 나의 손 사이에서 나는 무한히 '시적인 것'을 본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어린 시절에 보았던 이발소 그림도 어떻게 보면 '시적'이다. 여공들의 자취방에 걸린 '생활이 비록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푸쉬킨의 시도 보기에 따라서 지극히 시적이다. 요컨대 나에게 시는 '시적인 것'의 '보기'(창조가 아니다!)에 의해 얻어진다."

80년대 후반에 우리 평단에 불어닥친 포스트 모더니즘 열풍에 휩싸여 이 시들에 대해서 <해체시>, <포스트모더니즘 시>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진단의 유효성에는 의문이 있다.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여주는 형식실험이란 기본적으로 중심, 의미의 부재라는 표상 아래 인식, 현실재현의 불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황지우에게서 형식실험은 소통이 막혀버린 시대에 효과적인 소통의 수단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황지우의 초기 시에 흔히 보이는 인위적인 기법, 낯선 시 형식은 작가의 말 그 대로 변화된 시대의 변화된 내용을 담아 내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不通이 아니라 疏通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시적 전달장치의 확대, 전통적인 서정시의 확장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황지우가 "나는 한 번도, 이른바 실험시를 쓴 적이 없다. 나는 사실은 리얼리스트이다. 일그러진 형식은 일그러진 현실에서 나온다."라고 밝힌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겠다. 황지우의 실험시들은 일그러진 현실로 인한 것이며, 이것은 브레히트적인 의미에서의 리얼리즘과 맥을 같이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소설을 달리 읽는다 Der Filmesehende liest Erz hlungen anders"는 브레히트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시대가 바뀌면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테제에서 출발하여 라디오나 영화, 사진과 같은 현대의 기술매체를 자신의 작품에 과감하게 도입하려 노력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발견되지만, 이 두 작가에게서 형식실험의 목적은 같은 맥락에서 연유함을 확인할 수 있다.

6. 시와 소격

황지우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가령 know, see, hear, love, hate 등과 같은 동사는 진행형을 사용할 수가 없읍니다. 주부 여러분, 이건 다만 관습일 뿐이죠.
-[그들은 결혼한 지 7년이 되어]에서

위에 열거한 동사들이 진행형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그저 '관습'으로 치부되고 있다고 황지우는 보고 있다. 관습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이 동사들은 진행형을 갖지 못하는가 하는 원인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관습으로 치부되는 시대의 금기사항, 즉 "굳어진 관념"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그러나 황지우는 관습처럼 내려오는 것들 하나하나에도 물음부호를 삽입하려고 한다. 이것이 황지우의 초기시의 출발점이다. 그는 "내가 의도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즉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 현실을 의문부호로 놓음으로써, 침묵에 싸인 현실의 끝을 더듬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했다.

"나는 시에서, 말하는 양식의 파괴와 파괴된 이 양식을 보여주는 새로운 효과의 창출을 통해 이 침묵에 접근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텍스트를 눈에 보이지 않는 콘텍스트 속에 잡아 넣어 우리에게 낯익었던 것들, 이를 테면 신문의 일기예보나 해외토픽, 비명(碑銘), 전보, 연보(年譜), 광고문안, 공소장, 예비군 통지서 등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토콜들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아주 '낯설게' 느끼도록 하는 효과에 나는 치중한다. 이런 고리타분하고 지저분한 것들이 시 특유의 고상하고 고결하고 고요한 영역을 점유했을 때 독자들이 받으리라고 기대되는 당혹감, 불쾌감을 나는 노리고 있다."

이 말을 요약하면, 황지우는 낯익은 텍스트를 생소한 콘텍스트에 집어넣음으로써 발생하는 '당혹감, 불쾌감'을 소격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이 추구하는 것은 '침묵에 싸인 현실의 꼴을 더듬'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은 브레히트가 말하는 소격 개념, 즉 "사건이나 성격으로부터 자명한 것, 알려진 것, 분명한 것을 제거하고 그에 대해 놀라움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 dem Vorgang oder dem Charakter das Selbstverst ndliche, Bekannte, Einleuchtende zu nehmen und ber ihn Staunen und Neugier zu erzeugen"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황지우가 시를 통해서 노렸던 '당혹감, 불쾌감'은 브레히트가 말하는 '놀라움과 호기심'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황지우가 낯선 시 형식을 통해 추구하는 기법이 브레히트의 소격 개념과 겹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IV. 낯선 시 형식을 통한 현실 드러내기: 거리 두기

1. 괄호의 사용

소격(효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독자가 시가 제시하는 환상 속으로 몰입하는 것을 막고, 이로부터 거리를 취하여, 이를 비판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황지우는 시에 자주 괄호를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거리를 조성하고, 시 속의 정서에 함몰되는 것을 미연에 막아준다. 이 시인의 시 가운데 [같은 위도 위에서], [徐伐, 셔발, 서울, Seoul], [의혹을 향하여]와 같은 작품에서 괄호를 통한 거리감 조성은 폭넓게 드러나는데, 그 중 가장 효과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인용 시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상을 낚는 그물,
물을 낚고 있네
대형 선박이
바리캉으로 뒤통수 밀 듯, 물 위로
기다란 흰 자취 끌고
부천 공단으로 들어오는 동안
(여기서 뭔 말인가 하려 했는데
잊어 버렸네)
응, 그렇지,
아이들이 뭉게 구름에서 잡은 氷菓
잠자리,
땅에 내려오자 녹아 버렸네
-[날개 속에 그물이 있다]에서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물', '그물', '선박' 등의 이미지를 통해 팽팽한 긴장감을 마련해간다. 그러다 갑자기 시적 화자 대신에 작가가 '(여기에서 뭔 말인가 하려 했는데/ 잊어 버렸네)'라는 진술과 함께 시에 개입한다. 그래서 시적 긴장감은 깨져버리고 이완된다. 이를 통해서 독자들은 이 이미지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새롭게 바라보며, 이어 나오는 '아이들이 뭉게 구름에서 잡은 氷菓/ 잠자리'라는 이미지와의 연관을 파악하게 된다. 고기를 낚아야 할 그물이 '물'을 낚고 있음으로 해서 여기에 나오는 그물은 방향설정이 잘못된 그물이다. 이 그물과 '부천 공단'이 지시하는 시니피에 Signifi 는 '사상'이라는 시어를 매개점으로 볼 때, 80년대에 열병처럼 불어닥쳤던 변혁운동과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 결과론이지만 '대형 선박이/ 바리깡으로 뒤통수를 밀 듯' 당당하게 진행되었던 이 땅의 변혁운동은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실패했고, 무기력해지고 만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氷菓/ 잠자리'나 '땅에 내려오자 녹아버렸'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다. 그러한 판단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시적 장치가 바로 괄호의 기능, 즉 '(여기서 뭔 말인가 하려 했는데/ 잊어버렸네)'라는 부분이다. 이러한 생소한 발화는 독자가 시적 정조에 함몰되는 것을 막아주고, 변혁 운동의 과오를 성찰할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2. 웃음 혹은 풍자

황지우의 시에서 웃음 역시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유지케 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웃음이란 본래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며, 이를 낯선 시각에서 바라보는 계기를 부여하기 때문에 소격효과를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림 R. Grimm은 "희극성과 소격은 본질적으로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 브레히트 스스로도 {묵적/變轉의 書 Me-ti, Buch der Wendungen}에서 묵적 Me-ti의 입을 빌려, "유머가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위대한 방법론[=변증법]을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다 F r Leute ohne Humor ist es im allgemeinen schwerer, die Gro e Methode zu begreifen"고 지적한 바 있는데, 질서가 곧 무질서라거나, 명예가 치욕이라는 해학은 웃음 자체로만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상태에 해명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소격의 방법론이 되는 것이다. 황지우의 시를 보자.

그때 거기서 나는 웃었다
이름을 대고 나이와 직업을 대고
꽝 내리치는 주먹
떨어지는 국화꽃잎 아래서
그때 거기서 나는 웃었다
컵의 물이 근엄한 近影에 튀었다
쓰레기통에서 자기 그림자를
파먹는 미친 개 같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默示의 물 우에 꽃잎 몇 개가
혓바닥처럼 떠 있었다.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全文

80년대 초반 살얼음을 걷던 시국, '나'는 어느 곳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있다. '꽝 내리치는 주먹/떨어지는 국화꽃잎'이라는 표현은 폭력으로 인한 지식인의 무력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이 시의 분위기를 무겁고 심각하게 해준다. 그러나 7행 이하에서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반전된다. 내리치는 주먹으로 '컵의 물'이 튀어,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근엄한 近影'에 묻는다. 이어 이 근엄한 근영이 '쓰레기 통에서 자기 그림자를/ 파먹는 미친 개'라는 이미지와 겹치면서 웃음을 자아내고, 거리를 갖게 하며, 동시에 근엄한 모습의 본질을 폭로한다.


V. 낯선 시 형식을 통한 현실 드러내기: 변증법적 구조

1. 인용, 몽따쥐

상투적인 어구,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낯익은 텍스트는 인식의 자동화현상을 일으켜서 그 의미의 허위성을 쉽게 깨닫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를 절단하고, 파편화시켜 원래의 콘텍스트로부터 떼어내서 새로운 문맥에 집어넣으면, 그 텍스트는 낯설어진다. "알려진 것이 인식된 어떤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상태를 벗어나야 Damit aus dem Bekannten etwas Erkanntes werden kann, mu es aus seiner Unauff lligkeit herauskommen" 하기 때문이다. 브레히트는 {묵적/變轉의 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체제를 이루는 문장들은 마치 범죄단체의 구성원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들은 하나하나 따져보면 더욱 쉽게 압도된다. 따라서 이것들은 서로서로 분리되어야 한다. 체제를 이루는 문장들이 인식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현실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S tze von Systemen h ngen aneinander wie Mitglieder von Verbrecherbanden. Einzeln berw ltigt man sie leichter. Man mu sie also voneinander trennen. Man mu sie einzeln der Wirklichkeit gegen berstellen, damit sie erkannt werden."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의식을 겨누고 쳐놓은 거대한 그물과 같아서 이를 전체로 다루다 보면 그 속에 빠져들어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를 하나하나 분리하여 새로운 콘텍스트에 집어넣거나(=인용), 가능하면 현실과 대조해 보면(=몽따쥐) 그 허구성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브레히트는 "몽따쥐와 인용에 소격효과가 담겨 있다 In Montage und Zitat stecken V-Effekte"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브레히트나 황지우의 시에서 인용이나 몽따쥐의 범주가 이데올로기 비판에 연결될 수 있는 계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용과 몽따쥐를 황지우는 "낯설게 느끼도록 하는 효과"로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를테면 신문의 일기예보나 해외 토픽, 비명, 전보, 연보, 광고문안, 공소장, 예비군 통지서 등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토콜들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아주 '낯설게' 느끼도록 하는 효과에 나는 치중한다."

브레히트와 황지우의 시 한 편을 보자.

1) 벽에는 분필로 쓰여 있었다.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
그것을 쓴 사람은
이미 전사해 버렸다.
-[벽에는 분필로 쓰여 있었다] 全文

2)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83.4.1-지:83.5.31.
-[벽.1] 全文

1)에는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는 구절이, 2)에는 예비군 훈련 벽보의 내용이 시에 인용되어 있다. 히틀러는 상대국이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빌미를 내세워 자국에서 군비증강을 서둘렀다. 게르만족의 우월성, 명예로운 전쟁, 빈곤추방 등의 현란한 구호에 파묻힌 국민들은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는 히틀러의 대대적인 선전선동에 속아넘어갔고, 이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는 범죄집단처럼 얽혀 있는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에서 전쟁부분을 떼어내서 이를 2행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전쟁을 원하는 세력은 히틀러인가 상대국인가? 이 시에서 인용부분은 대대적인 매스컴을 통해 선전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필로 성급히 휘갈겨 씌어 있다. 따라서 이런 낙서를 쓴 사람은 당국의 추적에 쫓기는 반체제 운동원일 것이고, 벌써 히틀러가 벌이는 전쟁에 징집되어 전사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이 시는 진짜 전쟁을 원한 사람은 다름 아닌 히틀러임을 폭로하고 있다.

두 번째 인용 시는 황지우의 것인데, 제목 그대로 벽에 붙어 있는 벽보나 현수막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활자의 크기가 이 시집의 일반 활자에 비해 매우 작고, 띄어쓰기가 무시되어 있어서, 적어도 벽보의 내용은 무가치하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느낌을 준다. 또 두 번째 행에서 기간을 나타내는 <자...지>라는 "매우 상스러울 수도 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서 듣기에 따라서는 1행의 내용에 대한 야유, 욕설을 함축하고 있다. 또 하필이면 그 기간이 4월과 5월이다. 4월과 5월은 우리 현대사에서 두차례에 걸쳐 커다란 변혁운동이 일어난 시기였지만, 얼마 못 가 군사 개입에 의해 짓밟혀 버렸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따라서 별다른 관심이나 비판없이 통용되어 오던 우리 현실의 한 요소가 이러한 <지적 조작>을 통해서 낯설어진다.

2. 정과 반의 대조

루트비히 K.-H. Ludwig는 브레히트의 미학체계를 사물(res)과 말(verbum)의 不一致, 즉 "존재로부터의 말의 소외 die Entfremdung der Sprache vom Sein"로, 마이어 H. Mayer는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對比로 설명했다. 여기서 말/상부구조(혹은 이데올로기, Entfremdung)를 正으로 본다면, 사물/하부구조(혹은 실재, Entfremdung der Entfremdung)는 反으로 볼 수 있는데, 정과 반의 대립을 통한 合의 명제로의 이행은 헤겔 변증법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이었다. 물론 앞에서 설명했듯이, 브레히트나 황지우의 경우 합의 단계는 생략된다.

1) 지체 높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명예로 이어질 것이다.
지체 낮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무덤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全文

2) 가상 적기 수대가 우리의 대도시로 오고 있읍
니다. 국민 여러분은 대피호로 안전하게 대피
해 주십시오. 뚜우...뚜우...시청앞 나오십시오.
네. 여기는 시청앞입니다. 시민들은 차에서 내
려 질서있게 지하도로 달려가고 있읍니다.

찬아, 옛날옛날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단다. 걔가 마을 사람
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단다. 늑대가 오지 않는다고도
생각ㅎ지 않았단다. 겁주려고 그런 것은 더욱 아니었단다. 단순
히 경보였단다.

여기는 부산입니다. 여기는 대굽니다.
여기는 광줍니다. 여기는 목폽니다.
여기는 대전입니다. 여기는 인천입니다.

찬아, 저기 손바닥만한 땅이 우리나라 땅이란다. 내려다보
이니, 산천초목, 개미새끼의 그림자 하나 꼼짝 없는 이 순간
의 저 땅이 우리나라란다. 저기다가 무얼 던지겠니? 눈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점점이 박힌 학교와 교회, 외국 대사관과
세무서와 파출소, 시장과 골목에서 네가 '사회생활'과 '국민윤
리'를 배우며 자라날 우리나라. 울고 들어오는 너에게 싸우지
말라고 꾸짖는 너의 엄마가 물려준 너의 모국. 14시 30분 현재
-[14시 30분 현재] 全文

1)의 시는 정과 반의 대조 형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지배자들이 선전하는 '명예'로운 전쟁이란 실제로는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전쟁임이 밝혀진다.

2)의 시는 민방공훈련 상황을 1, 3연에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줌직한 이야기를 2, 4연에 배치해 놓고 있다. 1, 3연은 커다란 활자에 절박한 어투로 인해서 듣는 사람에게 위기감과 절박감을 불어넣고 있다. 반면 2, 4연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호흡이 느려서 평화로운 느낌을 주며, 앞의 부분과 시각, 청각적으로 대비효과를 높이고 있다. 귀에 따갑도록 들어서 익숙해 있는 민방공훈련은 이 땅에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확산하는 데 상당부분 기여했다. 더욱이 전쟁과 반공 이데올로기는 어느 정도 정치적인 측면에 이용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절박한 분위기와 '손바닥만한 땅', '저기에다 무엇을 던지겠니?'라는 표현이 대조되어, 낯익은 현실을 낯설게 느끼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3. 병렬

힝크 W. Hinck는 브레히트의 연극을 "열린 극작술 offene Dramaturgie"로 보고, 이러한 극의 구성방식을 "병렬적인 구성원칙 das parataktische Aufbauprinzip"으로 설명했다. 브레히트의 문학에서 병렬구조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Furcht und Elend des dritten Reiches}에서처럼, 히틀러 치하에서 겪는 국민들의 공포감과 비참한 모습을 각각 독립된 장면으로 처리해서 제시하는 방법인데,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게스투스 목록 Gestentafel" 혹은 "27개 장면의 몽따쥐"라고 불렀다. 이러한 기법이 노리는 바는 비참한 장면들을 총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이 얻을 질적인 효과, 즉 헤겔 변증법이 말하는 '양의 질로의 전화'일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하나의 작품 속에 몇 개의 독립적인 부분줄거리들을 도입하되, 이들이 서로 비교.대조됨으로써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기법으로서, {도살장의 성 요한나 Die heilige Johanna der Schlachth fe}에서 탁월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는 1) 구세군 소속 요한나의 인도주의적 구제활동, 2) 도살업계의 거물 몰러 Mauler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주식투기, 3)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라는 세 줄거리가 서로 평행되게 진행되면서 서로 서로 간섭하며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은 변증법의 세 범주 가운데 '대립물의 상호 침투'의 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황지우 시의 경우 전자의 기법은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벽.3]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만 다루기로 한다.

1) 찻물을 끓이며 신문 읽기

이른 아침이면 신문에서
교황과 왕들, 은행가와 기름귀족들의 획기적인 구상들을 읽는다.
또 다른 한 쪽 눈으로 나는
끓는 찻물이
수증기를 내며
끓기 시작하다가 다시 맑아져서
냄비를 넘쳐흘러 불을 꺼버리는 것을 지켜본다.

2)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
-KBS 2TV, 산유화(하오 9시 45분)

길중은 밤늦게 돌아온 숙자
에게 핀잔을 주는데, 숙자는
하루종일 고생한 수고도 몰
라주는 남편이 야속해 화가
났다. 혜옥은 조카 창연이
은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명
섭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
누게 된다. 이모는 영섭과
은미의 초라한 생활이 안쓰
러워...

어느 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
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
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친구 누나의 벌어진 가랭이
를 보자 나는 자지가 꼴렸다.
그래서 나는 ...

브레히트의 시는 신문에 실린 지배자들의 세계지배 야망과 찻물이 끓어 넘쳐서 불을 꺼버리는 과정을 과정을 병렬적으로 제시한다. 이를 통해 지배자의 구상이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황지우의 시에는 신문에 나오는 TV 프로그램 안내에 실린 연속극 줄거리와 공중변소와 같은 은밀한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낙서를 "파편"으로 만들어 병렬적으로 인용해 놓고 있다. 이 두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고 가벼운 느낌을 주어, 이 시는 얼핏보면 매우 장난기 섞인 기교위주의 얄팍한 시처럼 여겨진다. 이제 각 연의 의미를 확대해 보자. 이 시의 1연이 KBS라는 공공 언론매체가 유포하는 메시지라면, 2연은 개인이 은밀하게 전달하는 사건으로서 정상적인 언로를 벗어난 왜곡된 장치를 통한 의사전달이다. 공공성과 은밀성, 정상과 왜곡이 서로 묘하게 대비되고 의미의 간섭, 상호침투를 야기한다. 이 두 연이 서로 병렬로 연결됨으로써 KBS라는 언론매체 역시 비정상적인 상태임이 슬며시 드러나는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1연에는 길중, 숙자, 혜옥, 창연, 은미, 명섭, 이모, 남편과 같은 매우 다양한 인물들이 현란하게 등장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매우 추상적이고 전달 내용도 진부한 사건이어서 독자들이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알맹이가 없다. 2연의 내용 역시 무가치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1연에 비해 매우 구체적인 '정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1연에서 나오는 내용의 공허함, 추상성은 2연에서 나오는 내용의 생생한 구체성과 대비되어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 허구성이 더욱 확실하게 부각된다. 따라서 "KBS로 상징되는 관제언론, 즉 반소통의 거대한 국가장치는 화장실의 저속한 낙서와 겹"쳐서 이 시는 관제 언론에 대한 신랄한 야유를 보내고 있다. 현실의 "징후"를 파편으로 제시하고, 징후를 따라 그 본질을 더듬게 하는 탁월한 기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4. 의미의 비약

중간 과정에 대한 해명없이, 갑작스런 의미의 비약을 브레히트나 황지우의 시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당혹감, 생소함을 느끼게 되고 사고를 통해 스스로 비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게 된다.

1) 나의 어린 아들은 묻는다. 수학을 배울까요?
뭣때문에, 라고 나는 답변하고 싶다. 빵 두 조각은 하나보다
많다는 것을
너도 알텐데.
나의 어린 아들은 묻는다. 프랑스어를 배울까요?
뭣때문에, 라고 나는 답변하고 싶다. 이 제국은 몰락할 텐데.
그리고
손으로 배를 문지르며 끙끙대기만 해봐라
그러면 너의 뜻은 금방 전달될텐데.
나의 어린 아들은 물어본다. 역사를 배울까요?
뭣때문에, 라고 나는 답변하고 싶다. 땅에 너의 머리를 숨기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너는 아마 살아 남을 것이다.
그래, 수학을 배워라, 나는 말한다.
프랑스어를 배워라, 역사를 배워라.
-[1940]全文

2)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심인]全文

수학, 프랑스어, 역사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의 소망과 배우지 말라는 아버지의 답변이 이 시의 1연을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은 전시이고, 이를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니라 '땅에 머리를 숨기는 법'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연에서는 뜻밖에 수학, 프랑스어, 역사를 배우라는 아버지의 충고가 이어진다. 1연과 2연 사이에는 아무런 매개도 없이 의미의 비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황스러움, 놀라움을 주는데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 매개항을 스스로 찾아내기 위해 사고를 作動시키게 된다. '내'가 '아들'에게 갑자기 수학, 프랑스어, 역사를 배우라고 충고하는 이유는 히틀러의 전쟁은 곧 끝나게 되어 있으며, 히틀러와 같은 야만을 이기기 위해서는 수학, 불어, 역사와 같은 지성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밝혀 내는 것은 독자의 임무이다.

황지우 시 역시 처음 3연은 신문이나 잡지에 난 심인광고를 그대로 인용하다가 갑자기 4연에서는 전혀 엉뚱하게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여준다. 따라서 1-3연과 4연 사이에는 의미상의 비약이 나타난다. 이 시를 읽는 독자 역시 스스로 이 두 부류의 연 사이의 연관성과 생략된 의미를 추적하게 된다. 물론 그 실마리는 이미 시에 주어져 있다. 1연에 나온 '80년 5월 이후 가출/소식두절'이라는 표현에서 이 실종자는 당시 "남도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비극"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글을 읽는 독자는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1연에는 찾는 이유와 찾는 사람, 연락처 등이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2연과 3연으로 가면서 이러한 긴장감은 깨어지고, "마침내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라거나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라는 표현에 이르면 완전히 상투화되어 빈 껍데기만 남고 만다." 더욱이 2-3연은 1연과는 달리 찾는 사람도 연락처도 나와 있지 않다. 심인 광고이기는 하지만 찾겠다는 구체적인 의지 마저 부재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1-3연은 어느 평론가의 지적대로 80년대 내내 우리 현실의 아픔으로 작용했던 광주의 문제가 세월이 가면서 점점 희석되어 갔고, 국민들도 이 문제를 무심한 마음으로 지나치게 되는 과정을 지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4연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나' 역시 현실의 아픔을 남의 일처럼 지나쳐버리고, 나아가서 이를 화장실에서 변을 볼 때, 심심풀이로 읽는 읽을 거리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대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학, 내지는 '나'의 무기력함이다. 현실의 징후를 매개없이 제시하고,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익숙해 있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잘못된 삶을 반추해 볼 계기를 부여받게 된다.


VI. 맺는 말

황지우는 팽팽한 시적 긴장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노력해 왔다. 평론가들이 그의 시에 주목한 이유는 대체로 "그의 시에는 특이한 종류의 경쾌함과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독창적인 운율이 있고, 감동과 아이러니"가 있다는 점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특이한 종류의 경쾌함과 불협화음'은 브레히트의 소격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고,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였다.

시대에 대한 풍자, 야유, 조롱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볼 것을 가르쳐온 그의 시가 거둔 성과는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를 위시하여 그의 많은 시 底邊에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즉 이 세상 바깥에 있고 싶은 욕구-이것을 따지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다-가 감추어져 있다. 그의 시를 도도히 흐르고 있는 우울은 때로는 냉소로 변하여, 기법의 가벼움이라는 상처를 남긴다. 이 말은 브레히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무거움, 즉 소격과 변증법을 통한 현실과의 끈질긴 대결의식, 생명력이 그의 시에서는, 브레히트의 경우와 비교할 때, 훨씬 빈약하게 나타남을 의미하고, 따라서 그가 소격의 흉내내기에만 그치지 않았나 하는 혐의점을 지우기가 어렵다. 또 하나, 브레히트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인위적 기법을 동원하여 "보여주고, 하게한다"는 황지우 式의 시가 '보여주기'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하게'하는 데에도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는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류의 문학은 자칫하면, 오히려 그 주된 독자층이 될 지식인들에게까지 단순한 오락으로 전락해버릴 위험도 없을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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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황지우 시집, 문학과 지성사, 서울 1990.
황지우: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황지우 시선, 미래사, 서울 1991.
황지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출판사, 서울 1993.

출처 : 집, 이은환
글쓴이 : 이은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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