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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죽음-"부시 대통령, 에이즈 철자는 아나?"

이보규 2011. 3. 26. 19:11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죽음

"부시 대통령, 에이즈 철자는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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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 입력 2011.03.26 11:19 | 수정 2011.03.26 11:26 | 누가 봤을까? 20대 남성, 서울

 

[오마이뉴스 한나영 기자]

"부시 대통령, 미스터 퀘일(부통령), 헬름 의원(5선의 공화당 상원의원), 당신들의 정책은 잘못됐어요. 완전히 잘못된 거라고요. 당신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잖아요."

모두 침묵하고 있을 때 그녀는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부통령, 최다선 상원의원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그들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호통쳤다. 1992년 국제 에이즈 컨퍼런스에서였다. 당시 미국은 에이즈 바이러스인 HIV를 가진 사람에 대해 미국 비자 발급을 제한했는데 바로 이 점을 질타한 것이었다.



이렇게 담대하게 소수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여성이 바로 오늘 우리가 추모하는 할리우드의 전설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다.

테일러가 사망한 지난 23일, 미국의 주요 언론은 매 시간 그녀의 사망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특히 그날 저녁 케이티 쿠릭이 진행하는 CBS-TV의 < 이브닝 뉴스 > 에서는 일본의 방사능과 리비아의 카다피 소식을 제치고 테일러 사망 소식이 뉴스 첫 꼭지를 장식했다.

세기의 여배우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스크린의 전설이었다. 전문적인 배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는 그녀는 한 카메라맨으로부터 "나쁜 각도가 없고 흠 없이 완전한 대칭의 얼굴"을 가졌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완벽했다.

하지만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연기를 인정받은 영화배우로만 있지 않았다. 호사가들의 입을 분주하게 만든 가십거리도 그녀를 늘 따라다니던 트레이드마크였다. 즉, '남편 1'부터 '남편 7'까지 이어지는 남편 시리즈. 69.42캐럿짜리 '테일러버튼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각종 보석류. 아파트 몇 채를 합쳐 놓은 크기와 같다는 옷장. 최소 6억 달러라는 화려한 맨션은 그녀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추모의 물결과 인터넷에 연일 넘쳐나는 애도의 메시지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를 추모하는 이유


지난 23일 < 뉴욕타임스 > 에는 연극·영화 평론가인 멜 구소 기자가 쓴 '할리우드 글래머의 눈부신 절정'이라는 제목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부고기사가 실렸다. 2005년에 사망한 기자가 미리 써둔 부고기사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테일러를 추모하는 누리꾼들의 댓글이 이 한 편의 기사에 무려 646개나 달렸다. 다음은 그러한 댓글 중 하나다.

"영화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 판정을 받았을 때 테일러가 드러내놓고 그를 지원했던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별로 없었다.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 에이즈 퇴치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모았고 사람들이 에이즈 환자를 두려워하던 초창기 시절에도 에이즈 환자와 직접 악수했다. 우리는 그 사실만으로 그녀에게 빚진 게 많다.

테일러는 에이즈 환자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오랜 친구이자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로 알려진 로디 맥도넬과 록 허드슨, 몽고메리 크리프트에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해줬다."(Anna)

(*기자말: 동성애자로 알려진 영국 출신의 영화배우인 로디 맥도넬은 테일러와 함께 < 클레오파트라 > 에 출연했고, 록 허드슨은 < 자이언트 > 에 출연했다. 한편, 양성애자로 알려진 몽고메리 크리프트는 테일러와 함께 < 젊은이의 양지 > 에 출연했다.)

에이즈에 대해 편견 대신 열린 마음을 가졌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는 자신의 '스타 파워'를 이용해 소외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즉, 자신의 유명세와 영향력을 사람들이 기피하는 에이즈를 퇴치하는 일에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테일러의 선행은 다른 할리우드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되어 샤론 스톤을 비롯한 몇몇 스타들이 테일러와 함께 수년 동안 < Macy's Passport Gala > 쇼에 참여하여 에이즈 환자를 돕는 자선활동을 벌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테일러의 활동에 감동을 받았고 그녀에 대해 '사회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 누리꾼의 절절한 애도 메시지다.

"오늘 우리는 사랑과 결단, 도전과 힘으로 편견과 수치, 차별, 부당함에 맞서 싸웠던 한 강력한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진정한 지브롤터 바위(Rock of Gibraltar)는 사라졌지만 그녀의 사랑과 강인함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일은 끝났습니다. 당신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청사진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났습니다."(Beverly G)

의로운 분노... 에이즈 연구 기관을 설립하다

반전·인권 운동에 관심을 갖고 정치적인 활동을 해온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영화 < 줄리아 > ) 수상자인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유튜브에 올라온 앰파(미국 에이즈 연구 재단, amfAR- The American Foundation for AIDS Research)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추모 비디오 에서 그녀를 이렇게 묘사했다.

"에이즈와 싸우기 시작한 첫날부터 그녀의 빛은 횃불처럼 비쳤다."

이러한 테일러의 열정에 대해 전 앰파 회장인 머빈 실버만은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HIV나 에이즈에 대해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초창기인 그때(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에이즈에 대해 엄청난 불명예와 편견, 공포를 가졌습니다. 바로 그때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였지요. 물론 에이즈 재단의 모금운동을 벌이는데도 적극적이었고요. 테일러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실버만 회장은 테일러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조차 생소한 정체불명의 질병인 에이즈로 고통 받고 있을 때, 의회나 백악관, 일반 대중 그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때, 그래서 에이즈 환자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테일러는 모금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외면하고 거절하고 자선모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에이즈에 대한 치욕스러움 때문에요."

하지만 테일러는 분연히 일어서 외롭게 에이즈 퇴치 운동을 벌였다. 그녀는 2003년 < 래리 킹 라이브 쇼 > 에 나와 1980년대 초반 자신이 에이즈에 관한 열정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들 그 병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 점이 저를 화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정말 끔찍하지 않냐. 비극 아니냐'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지요. 하지만 누구도, 어떤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 점이 더욱 저를 분노하게 만들었어요. 사실 이 일은 록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알기 전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결국 의로운 분노는 1985년 록 허드슨이 죽었을 때 3억2500만 달러를 들여 에이즈 연구 기관인 앰파(amfAR)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테일러는 앰파의 창립 국제 회장을 맡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에이즈와 HIV 바이러스를 주요 언론에 알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수많은 어록

테일러가 지원했던 건 앰파만이 아니었다. 다른 수많은 HIV/AIDS 기관도 지원했다. 1991년 10월 테일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이즈 재단(Elizabeth Taylor AIDS Foundation)'을 설립했고 이 재단은 테일러가 죽기 전 12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이처럼 에이즈 퇴치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테일러는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활동도 병행했다. '에이즈의 날'(12월 1일)에 UN 총회에 나가 연설을 했고 의회 및 전국기자클럽에 나가 당당하게 발언도 했다. 수많은 어록이 그녀가 떠난 자리에 여전히 우렁차게 남아 있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겁을 내면서 아무 일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침묵은 떠나갈 듯합니다. 이를 중단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워싱턴에 온 게 아닙니다. 내가 오늘 여기 온 것은 국가적인 수치, 무지와 무관심과 포기의 수치에 대해 말하려고 왔습니다."

"나는 부시 대통령이 에이즈에 대해 아무런 일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가 AIDS 철자(스펠링)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992년 제8차 국제 에이즈 컨퍼런스에서 부시 대통령이 에이즈를 의제로 채택하지 않은 데 대해 일침을 가하면서.)

이렇게 활발한 에이즈 퇴치활동을 벌인 공로로 그녀는 1993년 아카데미상 특별상인 진허숄트 인도주의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데임(Dame) 작위를 받기도 했다.



"이제 연기는 가식, 에이즈로 고통 받는 사람들 보는 것이 리얼"

테일러는 건강이 나빠 몸을 가누지 못하고 외출을 삼가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에이즈 퇴치 관련 행사에 참가하여 대중에게 모습을 보였다. 휠체어에 의지해 참석한 모임에서도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에이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지난 1995년, 테일러는 UCLA의 '에이즈 연구교육 센터' 봉헌식에서 AP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기는 이제 제게 가식적인 것입니다. 에이즈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리얼하지요. 그보다 더 리얼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하지만 누구도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뒤로 물러나 안주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휠체어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기사가 여러 번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큼 그녀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악조건에서도 에이즈 퇴치 운동을 열심히 벌였고 에이즈 환자의 외로움과 고통에 적극 동참했던 아름다운 사회활동가였다.

세기의 여배우, 할리우드의 전설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가졌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하지만 에이즈 환자를 향한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과 활동은 그 어떤 수식어보다도 더 화려하게 빛날 것이다.

"데임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이즈 환자들이 병실에 걸어둔 당신 서명이 들어간 사진을 봤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열심히 수고한 당신, 이제 다 내려놓고 고통 없는 그곳에서 안식을 취하소서!"



휠체어에 의지해서도 활발하게 에이즈 퇴치 운동을 벌였던 테일러.

ⓒ 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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