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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와 그리운 어머니 !

이보규 2007. 7. 10. 09:11
 

    봉선화와 그리운 어머니 


공무원연금으로 발행하는 “공무원연금” 이라는 월간 정보지가

매달 꼬박 꼬박 집으로 배달  되어 오는데

오늘도 많은 다른 우편물과 함께 7월호 잡지가 배달 되였다.


습관적으로 포장을 뜯어 버리고 펼쳐 보다가 한 면에 수록한 명시 산책 란에

봉선화라는 시를 보고 한동안 낭송하지 않은 친숙한 시가 유독 크게 보였다.

이 시가 얼마만인가 ?


일제 때 우리민족의 애국심을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로 애국심을 일깨웠다던 중학교 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부터

나는 봉선화가 다른 꽃과는 다른 꽃으로

고향집 장독대 옆에 채송화, 백일홍, 분꽃과 나란이 심어 유독 봉선화를 볼 때 마다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 왔다.


고등학교 교과서인가 중학교 교과서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는데 이 봉선화 시가 좋아서

암송하고 다녔었다.


            “봉 선 화

                        김상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가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 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나는 이 시(詩)를 정말 좋아했다.

여름이면 무명지 손가락에 분홍색 봉선화물을 들였다가 손톱이 자라 없어 질 때

아쉬움에 다음해를 기약 했던 추억과 친 누님은 없었지만

 집안 친척누님들과의 봉선화물을 들이던 생각이 아름다운 봉선화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또 어머니라는 시를 좋아 했다.

“나의 무릅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 까만 젖 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어린 남매 이 젖 물고 크더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울 때 눈물 담아 암송 하던 시들이 생각나고 ......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소월의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이여 ”

즐겨 암송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생활 속에서 시가 사라 졌었다


시골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바뿐 공직생활 36년은 나에게 정서를 모르고

시를 잊고 살 도록 강요(?) 했고 그 사실도 모른 체 살아 왔다.


오늘 봉선화 시를 배우던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니 어언 50여 년 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정년퇴임 한지도 벌써 만 5년. 내 나이도 망칠이 되었으니

세월이 정말 빠르다.

 

세월과 시간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없이 지나가는데,

내 몸도 나와 상의 없이 늙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 고향마을 장독대 옆에

반쯤 피어있을 봉선화가 보고 싶다.


장독대에서 앞치마 두르시고 된장 고추장을 퍼내시던 어머니,

마루에서 안반과 홍두깨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국수를 만드시던 어머니!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대문을 들어오시는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 어머니 !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어 울고 있는

내 모습을 어머니가 지금 보고 계실까?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혼수로 가져오신 장농을 바라보니 옛날 시골집에서

 이 장농을 안방에 두고 마른 걸레로 늘 닦으시던 어머니 모습이 보인다. 

 

어릴적에 칭얼대며 어머니의 무릅 베고 옆으로 누워 있으면

귀찮타고 하시면서도 흘린코도 닦아주시고 귀지개로 귀속을 청소를 해 주시던

어머니의 그 따뜻한 손길이 너무 그립다.

 

먼훗날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날때

 "나는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얼마나 울었는지 어머니는 아느냐"고

꼭 여쭈어 보리라.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천년 만년 영원히 살리라 . 끝

                                   

                ( 2007년 여름 공무원 연금 잡지를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