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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모든것

이보규 2008. 6. 6. 06:31
오바마 대선 후보 되기까지
차별에 울던 소년, 술·마약을 넘어 ‘담대한 희망’을 쏘다
두 살 때 부모 이혼해 백인 어머니 슬하서 성장
인종 콤플렉스 극복 후 축복 뜻하는 ‘버락’사용
5번째
[중앙일보]2008.06.05 01:15 입력 / 2008.06.05 08: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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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버락 오바마(46) 상원의원. 케냐인 아버지와 미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드라마만큼이나 극적이다. 그의 삶은 미국 인종 문제와 ‘아메리칸 드림’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상처·혼돈·방황=오바마는 1961년 8월 4일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케냐 유학생으로 하와이대에 다니던 아버지는 60년 러시아어 강의를 듣다 만난 백인 여학생 스탠리 앤 던햄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에게 자기 이름을 물려준 아버지는 하버드대 대학원(경제학)에 진학하며 가족을 떠났다. 이후 오바마의 부모는 그가 두 살 때 이혼했다.

스탠리 앤은 하와이대에 유학 중이던 인도네시아인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했다. 오바마는 여섯 살 때 부모와 함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사해 이슬람 학교와 가톨릭 학교를 2년씩 다녔다.

71년 어머니가 롤로와 결별하자 오바마는 외조부·외조모가 사는 하와이로 돌아갔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오바마는 당시 케냐 재무부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만났다. 하와이를 찾은 아버지는 농구공을 선물했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농구를 했다”는 게 오바마의 회고다. 농구는 지금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때가 마지막이다. 오바마는 82년 케냐 방문 계획을 세웠으나 그해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하와이의 명문 사립학교(초·중·고 과정 포함) 푸나후에 5학년으로 전학한 오바마는 백인 아이들의 인종 차별적 태도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같은 반의 유일한 흑인 여학생을 가리키며 “여자친구니까 키스하라”는 등 오바마를 놀렸다. 그는 백인 아이들에 대한 분노를 분출하기 위해 동전을 운동장에 던지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고교 땐 농구선수로 뛰면서도 피부색에 대한 번민 때문에 술과 담배·마리화나를 입에 댔다.

오바마는 79년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털대에 입학했다. 이 대학 정치학과 로저 보시 교수는 “오바마는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바마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가 보시를 찾아가 “학점을 너무 나쁘게 줬다”고 따졌다가 “너는 머리는 좋지만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힐난을 들었다고 한다. 오바마는 이곳에서도 농구 대표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흑인 학생들과 동아리를 만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을 규탄하는 집회를 주도했다.

◇성숙과 변신=오바마는 81년 아이비리그 소속(동부의 8개 명문 사립대학) 컬럼비아대에 편입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그랬다”고 한다. 그는 ‘새사람’이 됐다. 마약을 끊고, 폭음을 하지 않았으며, 공부에 열중했다.

정치학과 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수도승처럼 공부했다”고 회고한다. 이때부터 오바마는 어렸을 때부터 쓰던 ‘배리(Barry)’라는 애칭을 버리고 정식 이름인 ‘버락(Barack)’을 사용한다. 버락은 스와힐리어로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오바마가 본명을 사용한 것은 흑인 콤플렉스에서 어느 정도 탈피했기 때문이다. 그는 올 3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버락’이란 이름을 썼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83년 졸업을 앞두고 공동체 운동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흑인을 중심으로 한 풀뿌리 조직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민권운동 단체 등 여러 곳에 편지를 보내 일자리를 구했지만 응답이 없자 일단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85년 시카고 남부 빈민 지역을 돕는 단체에서 드디어 도움을 청했다. 연봉이 1만3000달러밖에 되지 않는 직업인데도 그는 흔쾌히 응했다. 그는 주민들을 교육하고, 생활 환경을 개선하는 운동을 3년 동안 전개했다. 이때 시카고 트리니티 유나이티드 교회의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를 만나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고, 개신교 신자가 됐다. 하지만 오바마는 라이트가 미국을 비난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자 얼마 전 결별을 선언한 데 이어 교회에서도 탈퇴했다.

88년 9월 오바마는 하버드대 법과대학원에 입학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권력과 기업, 은행 등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카고 주민들에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는 89년 여름방학 때 시카고를 찾아 시들리 앤드 오스틴이라는 작은 법률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그때 자신에게 법률 실무를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흑인 여성 변호사 미셸 로빈슨을 만났다. 오바마는 하버드 출신인 미셸에게 호감을 느껴 데이트 신청을 했다. 미셸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곧 그와 사귀기 시작했고 92년 결혼했다.

오바마는 90년 흑인으론 처음으로 권위 있는 법률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장으로 뽑혔다. 하버드 역사 104년 만에 흑인 편집장이 된 오바마는 당시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선출된 건 미국이 진보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법과대학원을 우등 졸업한 그는 대형 법률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마다하고 시카고로 돌아갔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유권자 등록 운동을 했다. 그는 소수민족과 저소득층 시민 10만 명 이상을 투표권자로 만들었다. 이후 시카고의 작은 법률회사로 자리를 옮겨 흑인 인권 향상과 주거 환경 개선에 앞장섰고, 시카고대에서 헌법 강좌도 맡았다.

◇희망과 도전, 그리고 성공=오바마는 96년 지역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뒤 저소득층 노동자의 조세 부담 경감과 복지 향상, 정치윤리 개혁에 초점을 맞춘 입법활동을 했다. 덕분에 98년 다시 뽑혔다. 2000년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해 실패했으나 2년 뒤엔 주 상원 3선에 성공했다.

2004년 7월 그에겐 상상하지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돕던 그에게 보스턴에서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선거자금 모금행사장에서 오바마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케리가 부탁한 것이다.

“부모가 ‘버락’이란 아프리카식 이름을 붙여준 건 그것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야윈 소년이 미국에서 잘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었다. 희망의 담대함(the audacity of hope), 그것은 신이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자, 미국의 근본이다.”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오바마는 미국인의 자긍심을 치켜세운 이 연설로 스타가 됐다. 그해 11월 오바마는 그가 나중에 쓴 책의 제목답게 ‘담대한 희망’을 품고 연방 상원의원 선거(일리노이주)에 도전했다. 그리고 흑인으론 사상 다섯 번째로 상원 입성에 성공했다.

상원에서 오바마는 개혁적이었고, 초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가 가장 먼저 발의한 법안 중 하나는 불법 체류자를 구제하는 이민 개혁 법안이었다. 법안은 가결되지 않았지만 발의 과정에서 그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협력했다. 지난해엔 매케인과 함께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량을 2050년까지 66% 줄이자는 법안도 냈다.

지난해 2월 그는 더 ‘담대한 희망’을 품었다.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 그래서 워싱턴의 정치를 바꾸고 미국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대중 앞에 밝혔다. 일각에선 “상원 경력이 2년 조금 넘은 신출내기가 대통령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다음을 기약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전했다. 그리고 변화를 갈망하고 희망을 찾는 미국인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켰고, 그걸 조직으로 바꿔 힐러리호를 격침시켰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