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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박근혜가 세종로에 나온다면

이보규 2008. 6. 7. 07:14

[김순덕 칼럼]박근혜가 세종로에 나온다면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마녀용 상품만 파는 가게가 미국 디즈니월드에 있었다.

‘착한 것보다 착하게 보이는 게 더 좋다’고 새겨진 티셔츠가 옷장 어딘가 처박혀 있다.

착하기도, 착하게 보이기도 자신 없지만 착하게 글쓰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시점에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글을 쓴다면 이럴 성싶다.

‘먹을거리의 안전성과 국민건강 및 자존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만하고 무능한 이명박 정부는 즉각 쇠고기 재협상을 선언하고,

향후 국정운영은 민심(여론조사와 인터넷 게시판 포함)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100년 전 같은 세계화의 세계화

5일 저녁부터 72시간 철야집회에 들어간 사람들은 2008년 6월을 1987년 ‘6월 항쟁’과 비교한다.

‘6·29 선언’처럼 정권이 국민에게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과 재협상의 가능성에 대해선 전문가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리는 게 현실이다.

누구도 세상과 미래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어차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다.

착한 글도 좋지만 그래서, 그 다음엔 어쩌자는 건지 따져봐야 역사에 죄짓지 않는 일이다.

 

이 정부의 실정()과 전두환 시대의 반()민주가 동격이라고 치자.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독재정권 혼자 결단하면 그만이었던 ‘직선제 개헌 수용’과 달리 ‘재협상 선언’엔 외국이라는 상대가 있고,

더구나 20년 전엔 지금 같은 세계화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미제 쇠고기가 진짜 위험하고, 그래서 재협상에 성공한대도 세계화 속의 한국 신뢰 추락은 불가피하다.

계약을 시장경제의 기본으로 보는 나라에선 우리나라를 계약 맺지 말아야 할 국가로,

우리 국민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낙인찍을 수 있다. 한미 통상 마찰은 감수하더라도

미국이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요구한다면 우리 자동차는 물론 쌀까지 양보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까짓 FTA나 세계화는 무시하고 살 수도 있다. 민심이 그걸 원한다면 말이다.

안 그래도 세계는 지금 세계화에 대한 반동으로 부글거리는 중이다.

미국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극명해진 보호무역주의와 이민 반대, 유럽을 휩쓰는 외국인 혐오와 공공조직 파업 등이 그 증상이다.

맞아죽을 각오로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미국 쇠고기 반대도 여기에 해당된다.

앞으로 닥칠지 모를 공기업 민영화 반대, 교육개혁 반대, 노조 총파업도 한 묶음이다.

 

100여 년 전에도 그랬다. 오늘날 못지않은 세계화로 번영과 더불어 빈부차가 커지자 유권자의 압력에 굴복한

유럽과 미국의 정치인들이 관세를 올리고, 이민과 해외자본을 제한했다. 결과는 경쟁 없는 세계가 아니라 1차 세계대전이었다.

부자 내각을 만들어 세계화 시대에 정말 필요한 개혁조차 부자만을 위한 정책으로 인식시키고,

그것도 설득과정 없이 밀어붙인 이 정부의 잘못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권을 퇴진시키고,

기업과 외국인투자를 내몰고, 세계화에 빗장을 걸어서 어쩌자는 건가.

 

역사적 책무 있는 정치인은 말하라

권력에의 아첨 못지않게 대중에의 영합 역시 위험하다.

진정 나라와 역사를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국민에게 “아니요”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라에 큰어른이 안 보이는 지금,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치인으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꼽을 수 있다.

 

나라에 도움 되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협력하겠다던 그가 나라의 앞이 안 보이는 이 마당에 친박 복당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다면,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 직무유기다. 그 역시 재협상을 주장했지만 어디까지가 실현 가능한 해결책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박 전 대표가 이 정부의 국정운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집권한 나라인데 이대로 흔들리게 둘 순 없다면,

이제는 세종로에 나와 말해야 한다. 정부가 사실상 재협상을 하고 있고,

내가 ‘광우병 쇠고기 절대불허단장’이라도 자임할 터이니, 나라도 믿고 돌아가 생업에 열중하시라고.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