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단상(斷想)
청암 이 보 규
비가 내린다. 종일 비가 내린다.
태풍 17호 ‘갈매기’의 북상과 장마철이 합작하여 중부지방에 종일 비가 내린다.
비가 가뭄 끝에 내리면 기쁨이오, 무더위에 한바탕 쏟아지는 소나기는 마음속의 더위까지 씻어 낸다.
창밖에서 유리창에 부딪히며 내리는 빗방울은 추억을 되살리게 하고 낭만을 불러 많은 생각이 나게 한다.
그러나 오늘 내리는 비는 낮은 하늘에 서울 하늘을 어둡게 하고 마음도 우울하게 만든다.
비가 오면 옷이 젖어서 초등학교 때 학교 갈 때 우산이 없어서 볏짚으로 만든 도랭이를 어깨에 메고
가기도 하고 그냥 비를 맞고 집에 오면 책보에 싼 책이 젖어 방에 펼쳐 놓고 말리던 생각이 난다.
종이(紙)우산이라고 해서 종이에 기름을 바른 우산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비 오는 거리는 비닐우산으로 발전 했지만 한 번 쓰고 나면
이미 헌 우산이 되어 그냥 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비닐우산을 구경할 수가 없다.
그 무렵 검은 헝겊 우산이 있어 여러 번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지만
값이 비싸서 서민이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접는 우산이 보편화 되고 결혼식 등에서 답례품으로 주기도 하고
사은품으로 값싼 중국제 우산이 많아져 우산은 집안에서 거추장스러울 만큼 흔해졌다.
우산을 잃어버리기 일쑤지만 잊어도 또 집에 많이 있으니까 아쉬움도 없다.
시골에서 농사일할 때는 비가와도 개의하지 않고 농사일을 계속했다,
장마가 지면 논둑이 터져서 비를 맞으며 논둑을 보수하고 밭에 물이 고이면 물길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비가 내리면 논농사 일은 그냥 하지만 밭농사 일은 쉬는 날이다.
그래서 일할 수 없어 빗소리 들으며 낮잠을 자면 맛이 피로가 풀리기 때문에 비가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신문 배달할 때는 비가와도 시간 맞추어 양손을 동시에 사용해야 하므로
비가와도 우산을 사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신문을 비에 맞게 하면 배달할 수 없어 비료 포대로 신문을 감싸고 뛰어다니다 보면
신문은 젖지 않아도 옷은 흠뻑 비에 젖는다. 팬츠 속옷까지 모두 젖으면 비가 내려도 걱정이 없다
더는 젖을 옷이 없으니까 비가 쏟아져도 마음이 편하다.
뛰어가다 넘어져 있으면 일어나지 않으면 또 넘어지지 않아서 편안하던 마음과 같다.
그래도 신문 배달할 때는 비가 싫다. 배달시간이 길어져서 매우 싫다.
내리는 비를 낭만으로 생각할 수 없을 때가 공직에서 수방 대책을 해야 할 때이다.
장마로 한강물이 수위가 높아지면 단계에 따라 사무실에서 대기해야 한다.
90년도 9월 S 구청의 건설국장으로 재직시절 홍수가 나서 성수동 마장동 행당동 일대가 침수되고
성내도 천호동도 침수되는 등 서울시 전체가 온통 물난리가 났다.
밤을 새우고 아침을 먹고 났는데 제방이 터져 물이 안으로 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급히 순찰차를 타고 현지에 도착하니 중랑천의 물길이 높아져 성수동의 뚝섬 제방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방송을 통하여 제방이 터진 사실을 전국에 알리고 바로 현장에서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방송이 나가자 서울시내 덤프트럭은 다 모아드는 것이었다.
주변에 있는 S 골재공장에서 자갈과 모래를 운반하여 제방에 붓기 시작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주민 대피명령을 하고 덤프트럭을 수십 대를 동원하여 겨우 오후 세시에 복구를 완료할 수 있었다.
이어서 한강하류 일산의 한강제방이 무너졌다. 방송에서 보도하여 주민대피는 했지만
농경지 유실은 불가항력이었다.
지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수해 사건의 중심에서 공직 책임자로서 장마를 이겨냈다.
특히 서울시 한강관리본부장 시절 장마로 한강고수부지가 침수하면
여의도고수부지 주차장의 주차한 자동차를 안전지대로 옮기는 일,
반포, 망원지구 저지대 시설물을 높은 도로 위로 대피 시키던 일,
수영장과 고수부지가 침수하면 군부대 장병 까지 참여시켜 바닥에 쌓인 흙을 치우는 일,
반포 잠수교가 물에 잠겼다가 물이 빠지고 난 후 차량 통행시키려고 환경미화원 독려하던 일 등
이제는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비가 많이 와서 수해로 사람이 죽고 농경지가 유실된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구 위에 피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최근 미얀마의 참상은 국가지도자의 오만으로
세계 구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피해지역의 아픔은 갑절이 되었다.
비가 많이 내려 수해를 당한 사례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반면에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 피해 또한 매우 크다. 대자연의 위력 앞에 무기력한 것이 사람이다.
지금은 빗소리가 낭만이요. 기다림이요. 그리움이다.
장맛비에 엉킨 사연이 지금은 추억이라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생존의 서바이벌이었다.
오늘 종일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되돌아 본 장맛비에 엉킨 추억을 그려본다.
고향에서 한밤중에 개울가에 세워 둔 보릿단이 늘어난 강물에 떠내려갈 것 같아 이를 막으려고
아버지와 소낙비를 맞으며 깜깜한 한밤중에 마을 앞 방천 둑에서 비를 맞으며 보리 단을 옮기던 생각도 스쳐간다.
그날 밤 조금만 더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으면 물이 불어나 떠내려갈 뻔했다.
육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서 비에 젖은 옷을 입은 체
야외 교장에서 빗물 맞으며 밥에 빗물이 고이는 식사를 하던 생각도 스쳐간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태풍과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없는 한 해로 기록되기를 기원해 본다.
해마다 한번 씩 지나가는 장마철인데 오늘은 왠지 우울한 것은 나이가 들어서일까
빗소리를 들으면서 새삼 옛 추억이 그리워진다.
아름다움도 낭만도 그리움도 비 오는 날 오후는 감성이 나를 적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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