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신앙
이보규 안수집사
나는 농촌에서 비교적 부유한 마을 이장이신 아버지의 6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큰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셨고 동네서 양반 가문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갑자기 가세가 기우러 농토를 다 팔아야 했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 하였다.
일 년 동안 농사일을 하여보니 견디어내기 어려워 도시로 뛰쳐나와 그 이듬해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신문배달, 약방배달 등을 할 때 밥을 굶기도 하면서 버티었다.
육군에 입대하여 트럭이 전복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나 혼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했다. 그날 밤 눈물을 흘렸다.
나에게 주어진 여건과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앞으로 쓸모가 있어 신이 지켜주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대북방송 아나운서로 근무하면서 방송이 끝나면 이를 악물고 코피 쏟아가며 밤새워 공무원 시험준비를 했다.
덕분에 제대 후 공채시험에 합격해서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자취하면서 또 야간대학을 다녔다.
등록금 마련이 힘들고 방 한 칸 없는 빈털터리지만 당시 대전시청에 근무하며 오래 교제하던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의 도움으로 전세방을 마련하고 공무원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일해 승진을 거듭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나는 야간에 학교를 다녀서 올빼미란 말을 즐겨 썼다.
아내 성기화 권사는 결혼 전부터 교회에서 성가대와 교사로 봉사하는 등 독실한 기독교인 이였다.
그러나 나는 젊음을 내세워 하나님보다 내 주먹을 더 믿는다는 신념으로 교회를 반대했다.
다급한 아내는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계속해야 했다.
그 기도의 응답은 비로소 12년 만에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1980년 내가 40세가 되던 해에 동네교회 목사가 나를 한밤중에 잠을 자고 있는데 찾아왔다.
앞집에 아주머니에게 귀신이 들었는데 내가 예수를 믿어야 고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무례한 행동을 화를 내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다가
내가 불쌍한 여자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이 솔깃하여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그 약속 때문에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예수를 알고 나니 세상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하며 구원의 확신 없이 허송한 젊은 시절이 무척 아쉽게 생각했다.
나는 기독교인의 사명은 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는 곳마다 기관에 신우회를 만들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시청신우회 총무로서 당시 한경직 목사님과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가님을 등을 초청해서 예배를 드렸다.
송파구청을 창설해서 신우회를 만들어 구봉서 장로와 싼까치의 가수도 모셔서 예배를 드렸다.
그후에는 매주 정기 예배를 드리고 기념예배때는 탈랜트 김창봉 잘로를 모시고 "빌라도의 고백 성극도 공연했다.
성동구청 건설국장 시절에 옥수중앙교회 목사님이 교회를 증축하려고 시유지가 포함된 땅을 사서
용도변경을 하려고 10년간 다 낡은 지적도를 들고 계속 구청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번 만나보고 이것을 즉각 해결해주었다.
그 교회 기공예배시에 평신도가 목사님과 같이서서 시삽을 하는데 참여 했고,
입당예배 때 전교인 앞에서 교회를 세우게 해준 공로를 추켜세워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990년 대홍수로 한강의 뚝섬 제방이 무너졌다.
즉각 현지에 도착하여 방송을 통해 주민대피명령이 내리고 필요한 조치 후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응답으로 7시간여의 작업 끝에 제방을 막아 인명피해 없이 서울시민의 생명과 나의 자리를 지켜 주셨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장 시절에는 직장에서 일부 반대도 있었지만,
목사님을 초청하여 조찬기도회를 개최해서 해마다 반복되던 한강에 홍수와 수해가
내가 재직하는 동안 고수부지에 물이 넘치지 않도록 지켜 주셨다.
그 후 한강에서 극동방송선교 본부장 박전복 목사 주관으로 하던 목회자의 “통곡의 강” 철야기도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후임 본부장은 이를 허가해주지 않아서 중단되고 말았다.
나는 서울시 말단 공무원으로 출발해서 승진을 거듭하여 서울시의 기관장까지 이르렀다.
정년퇴임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년퇴임식에 목사님에게 설교를 하고 축가로 찬양을 드렸다.
아내 성기화 권사는 교구 총무와 오랫동안 조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올해는 베테스다 선교회 부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내가 지방으로 강의하러 갈 때 운전으로 협력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동작구 신대방동 양문교회에서 대치동으로 이사한 후 83년도에 할렐루야교회에 등록하였다.
안수집사로서 친교위원회 선교위원회 경로대각위원회 예배위원회 문화사역위원회와 2년간 제직회 서기를 거쳐
올해는 기획위원회 실무팀장과 3교구의 지역장, 3안수집사회 총무 직분을 주셨다.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오직 감사기도를 드릴뿐이다.
지금은 공직에서 정년퇴임을 하였지만, 지난 7년 동안 새로운 일터 용인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21세기사회발전연구소장으로 전국의 각 지방자치 단체와 직장과 대학원 등에서 특강요청이 밀려오고 있다.
인기(?) 강사로서 건강하고 왕성한 활동을 지금도 계속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강의할 때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라는 명령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허용되는 틀안에서 영광을 가리지 않기위해 노력한다.
나는 정년을 뛰어넘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멈추지 않고
그동안 체득한 새로운 지식을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쏟아 낼 것이다. 끝
--이글은 할렐루야 신문사의 원고 청탁이 있어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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