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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상록수

이보규 2009. 2. 22. 15:17

                                                                   나와 상록수

                                                                                                                                           청암 이보규

 

                          

                                                      심 훈 선생이 상록수를 쓰시던 방 유품 앞에 앉아서 울고 있다.

 

 

심훈 선생의 <상록수>를 처음 읽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처음에는 국어 숙제인 독후감을 제출하기 위해  읽고 또 읽었다.

읽다보니 어느덧 나는 소설 주인공 박동혁이 되어 있었고 채영신은 나의 애인이 되어있었다.

 

 독후감을 프린트하여 우리 반 학생 전체에게 나누어 주고 대표로 발표했다.

국어 선생님께서 독후감도 잘 쓰고 발표도 잘했다고 칭찬을 하며 나를 따로 불러

문학공부를 해 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 상록수는 내 인생행로에 좌표가 되고 마음의 등대가 되었다.

 

군에 입대하기 전 상록수를 본받아 마을에서 제일 큰방을 정하여 야학당을 개설하였다. 

문맹자반을 만들어 나이 든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중등부를 만들어 중학교 진학 못한 학생을 모아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칠판 앞에 서서 학생에게 글을 가르치는 밤이 기다려지고 30여 명의 학생은 무척 열심히 따랐다.

 

당시 농촌지도소에서 농촌계몽을 목적으로 육성하는 4H클럽에 앞장서 

마을 4H 클럽 회장과 군 연합회 회장이 되어 농업개량과 농촌청소년 운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의 계몽운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위안을 목적으로 연극대본을 써서 추석 명절에 때 맞추어

연극도 공연했다. 제목은 “흙의 아들”이었다. 연출 겸 주연공 내가 맡았으니 일인이역인 셈이었다. 

하였고 그 주인공 이름도 동혁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설무대에서 우리가 공연하는 연극을 울면서 관람했던 추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군에서 전역하고 공무원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농촌을 떠나 살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바른 국가관을 심어준 것은 상록수였다.

 

서울시청 행정과에 근무할 때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농촌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전국으로 번졌다.

숙명처럼 서울시 새마을 담당자로 명령을 받게 되었다. 

나는 “서울의 새마을 운동” 기본계획을 서울시청의 담당자로서 주관하여 동료와 함께 꼬박 일주일 이상

여관에서 밥을 시켜 먹고 꼬박 밤새우며 계획을 수립해서 시장 결재를 받아 전 구청에 시달했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모든 정부 행정에는 언제나  새마을 운동이 중심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정신을 근면 자조 협동이라고 정의하고 그것을 구현하려고  

전국민에게 호소하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후 줄 곳 새마을 분야에 10여 년 이상 시청과 구청을 오가며 근무하여 정부로부터 

 “새마을 훈장 근면장”을 받았다.

국민의 정신계발과 환경개선이라는 큰 그림을 기리는 동시에 상록수 정신을 접목시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기본계획이 도시새마을의 시발점이자 근간이 된 것도 상록수 정신을 구현했기에 가능했다.

한편, 70년대 초 당시 총무처에서 주관하는 공무원 수기모집이 있었다.

주변의 권고로 응모한 나의 작품 제목을 “서울 빌딩 숲속의 상록수”로 정하고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이야기를 썼다.

 

소재가 도시 새마을은 범위가 한정되고 농어촌 공무원 수기가 월등하여

그 수기는 입상 못 하고 말았지만, 상록수를 가슴에 담고 밤새우며 집필했던 생각이 난다.

 

지난번 우연히 “사색의 향기 문화원”에서 “심훈 선생과 당진”이라는 문학 기행 소식을 알고

서둘러 참가 신청해서 문인들과 더불어 다녀왔다.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은 상록수의 고향이었다.

 

지난해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님의 활동 무대이던 안산시의 상록구의 “상록 아카데미” 초청으로

특강을 하면서 상록수와 나의 인연을 말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심 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도 내가 좋아서 암송할 수 있는 시 몇 편 중 하나이다.

 

선생이 생전에 설계하고 건립한 집 이름이 농부가 밭을 가는 심정으로 글을 쓰겠다고 이름 지은 "필경사"였다.

상록수를 집필하신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발견했다.

조그만 구석방 초롱불을 켜놓고 방석 위에 앉아서 집필하던 심 훈 선생을 상상하며

그 방에 들어가서 글 쓰신 책상 앞에 내가 앉아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55일 만에 상록수를 집필했다고 인솔한 김경식 선생의 진지한 설명이 찡하게 가슴으로 전해 왔다.

 

나는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서 선생이 영화 <먼동이틀때>라는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단성사에서 상영하여 흥행에도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정말 다재다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그의 죽음은 우리 민족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애국자, 거인 심 훈 선생이 조국을 위해 더 큰 일을 못하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돌아가신 것이 무척 안타깝다.

19살 되던 해 31운동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고 그 당당하심에 놀랐다.

일제에 저항하는 애국 선각자의 기개와 불꽃처럼 짧게 살다가 가신 위대한 심 훈 선생의 정신은

60여 년이 지난 이 순간도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에너지가 되어 있다.

 

필경사 옆에는 용인에 묻혔던 유골을 뒤늦게 모신 무덤이 있었다.

묘비에 “독립유공자, 작가” 심훈이라고 새기고 뒤늦게 200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라는

기록이 유독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큰 아드님의 월북과 막내아들의 미국이민이

그동안 심 훈 선생의 평가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생각을 쉽게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선생의 막내아들이 유품을 미국에서 보관하고 있고 천만다행으로 늦게나마

그 유품을 기념관으로 다시 가져오기로 했다는 소식이  무척 반갑고 기쁘기 그지없다.

유품이 돌아와 전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다시 가서 이번에는 선생을 만난 듯이 반가움에 소리쳐 울리라.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재가 전란 때마다 불타버리고 관리를 잘하지  못해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로 유출되고 복원할 수조차 없이 사라진 사실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래도 뒤늦게라도 심 훈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문학전시관을 새롭게 당진군에서 건립 관리하고

기념사업이 계획되고 계속 발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보고 문화 보존에 대한 중요성과

민족과 국가와 정신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