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많은 재주를 가진 친구
-7 순자축연 및 기념시집출판회에서 축사를 하고 나서 -
청암 이보규
H 국장에게 사진을 부탁했더니 솜씨가 이렇다
공무원으로서 근무할 때 만났던 사이다. 평소 형제처럼 지나는 후배 H 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등포구청에 함께 근무하던 K 친구가 고희연 겸 시집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나에게 축사해 줄 수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평소 퇴직하고 나서 그림을 그려서 가끔 전시회를 한다는 소식을 바람처럼 듣고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문인으로서 시집을 낼 정도라고는 중견 시인으로 성장하였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왜 당사자가 하지 않고 대신하느냐고 하니까 일부러 만나서 자기보다 나랑 더 친하니까
평소에 전화 한 번 하지 않다가 부탁이 어려워서 대신 전화로 타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그 친구가 먼저 전화해서 축사해 달라고 했다면 나는 하지 못할 구실을 찾았을 것이다.
마침 그날 다른 일정도 없고 저녁 시간이니 가서 축사 해주고 저녁 먹고 오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얼버무려 놓았는데 바로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H 군에게 이야기 들었고 일정이 비어 있는 시간이기에 봉사라는 생각으로 망설이지 않고 바로 수락하였다.
축사는 두 분께만 부탁한다고 했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인연은 1975년 영등포구청 총무과에서 처음 만났다.
키가 헌칠하고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얼굴도 잘생기고 특히 글씨를 보기 좋게 잘 썼다.
그 당시에 구청의 모든 보고서는 대부분 글씨로 써서 할 때니까 당연히 돋보였다.
직책도 총무과 총무계의 서무주임이니까 주사보의 직책으로는 최고의 보직이었다.
흠이라면 귀족 풍이라 조금은 거만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였다.
나는 당시 주사로서 총무과의 새마을지도계장으로 보직을 받아 구청에서 가장 힘든 자리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신앙처럼 추진하던 시기라 구정의 중심으로 소위 빛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기에
구청장의 배려로 구정 자문위원들과 구정자문위원회를 관리하는 그 친구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밤에 여흥시간이 있어 노래를 부르는데 이 친구는 대중가요를 가수 뺨치게 불렀다.
숙소에서 같은 방을 쓰면서 대화를 나누어 보니 대학시절 KBS 전속가수였다고 해서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총무과에서 근무했지만, 업무가 다르고 계가 다르니까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 후 나는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영등포구청을 떠나서 관악구청의 과장 보직을 받아서 가끔 만나면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로 좋은 관계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다.
또한, 인연은 내가 89년도 서기관으로 승진하여 국회에 서울시 국회연락관으로 근무할 때
그 친구는 영등포 여의도동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어 서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식당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식사를 한 번 같이 하자고 기약도 없었고 우리 사이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그 후 서로 연락하지 않아서
마음은 늘 곁에 있었지만, 길흉사나 연하장을 주고 받는 인맥 관리 파일에서 오래전에 제외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조심스럽게 축사를 하여 달라는 것은 고희연과 출판기념회의 분위기를
묵시적으로 명랑분위기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일 것이다. 그리고 서울시에 근무할 때를 회상해서
진심으로 축하해 달라는 부탁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차분히 그 뜻을 받아들렸다. 그리고 내용 있는 축사를 준비하였다.
나는 10분 축사를 하려고 그동안 발표한 작품을 보내 달라고 해서 다시 읽어보고 그림에 대한 전시회 실적과 평판을 들었다.
그리고 출판하는 시집을 미리 받아 작품을 몇 편 골라 읽어 보았다.
축사를 하려면 그 내용이 진실을 바탕에 두고 해야지 그 당사자를 향해 허풍을 떨거나 당사자를 과대 포장해서 말하면
참석자에게 실례가 되는 것을 정치인의 출판기념회에서 여러 번 보아온 터라 나는 사전 준비에 진력했다.
진실을 말하려고 다짐했다. 그래서 경력을 되돌아보며 알게 된 사실은 이 친구의 재주가 정말 다재다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거기에 건강관리를 잘해서 얼굴 피부에 주름이 없고 머리는 검은 머리 하나 없는
멋있는 백발이 지성미를 더해 주고 있었다.학창시절 공부도 잘해서 보성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시 공무원공채시험으로 입사했다. 대학시절에는 방송국 전속가수로 활동할 만큼 재주꾼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비굴하거나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말 그대로 모범 공무원으로 32년간 봉직했다.
공무원 생활도 성공하여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지방공무원으로 꽃인 동장으로 퇴임하고 나서
그림 그리기에 진력하여 개인전과 그룹 전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림도 이름에 걸맞게 값 비싸게 팔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 시작(詩作)에 심취하여 시를 다시 공부하여 시화집과 단행 시집을 여러 번 발표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고 스포츠 댄스를 10여 년 즐기며 2모작 인생을 화려하고 찬란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노력의 대가로 얻은 명성이지만 본질적으로 소질이 있고 예체능의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 고희를 맞아 시집출판의 주인공이신 한 사람에게 모든 재주를 모아준 하나님이
우리의 눈으로 보면 공평하신 분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모두 그 친구는 가지고 있었다.
나는 축사를 통해 이사실을 알리고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닮고 싶은 친구라고 추켜세우고
10분 축사를 마쳤더니 박수가 나오고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에서 강의를 들었다는 분과
향우회에서 만났다는 분 등이 다가와서 인사를 할 때 나도 그 순간에는 또한 스타(?)였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을 잘 활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특성을 더욱 연마하고 발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일을 성취하고 그것을 이웃과 더불어 즐기고 느끼며 나누어 주면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유명하지 않아도 좋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먼저 자신이 성취감을 느낌으로 행복할 수 있다.
시집 한 권 한 권 마다 낙엽 진 붉은 단풍잎을 책갈피에 부쳐서 감사하다는 말을 친필로 써서
자신의 그림을 삽화로 하여 정성스럽게 발간한 시집을 참석자에게 모두 한 권씩 나누어 주고 나서
그 시집 한 권 들고 인사말을 하다가 눈물을 글썽이는 순수함에 나는 가슴으로 그간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여러분! 오늘 이처럼 2모작 인생을 잘 갈무리하며 살아가는 친구가 우리 곁에 있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 이 친구가 더 좋은 시와 더 좋은 그림으로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하여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느 분이 말씀하신 태어날 때는 혼자 울고 주변에 모든 이가 웃었지만 죽을 때는 여한 없이 혼자 미소 지으며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너무 아쉬워 눈물 흘리게 하는 멋진 인생을 이 친구에게 본받고 우리 모두 남은 인생 멋지게 삽시다."
라는 말로 축사를 가름했다.
이어서 축하의 분위기는 축시 낭송으로, 색소폰 연주로 축하케이크 절단으로 무르익어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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