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통령 두 분의 죽음, 그리고 장례식
청암 이보규
우연이지만 두 분이 나란히 대통령을 하고 또한 나란히 인생을 마감했다. 출생시기도 다르고 정치하는 스타일도 서로 달랐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당을 지지기반으로 같은 지역 지지층의 결속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같은 부분이 있었기에 일정 계층의 절대적 지지에도 소위 보수층의 공감을 집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이 든 분이 먼저 대통령을 하고 젊은 분이 나중에 한 것은 자연스러웠는데 죽음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먼저 훌쩍 떠나버렸다.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미련없이 무책임(?)하게 떠나갔다. 봉하마을에서 태어나 그 부엉이 바위를 보고 자랐을 텐데 그 바위를 죽음의 도구로 이용했다. 불꽃처럼 살다가 대통령까지 하신 분이 시련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부 공개된 일기를 보면 자살로 가게 된 것은 일부 책임을 외부에 돌리면서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동정하는 뜻에서 여러 차례 그 뜻을 피력했었다. 결국, 국민장의 이름으로 모든 영욕을 육신에 모아 화장으로 재가 되어 고향의 사찰에서 머물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휠체어를 타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 나타난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 앞에 힘없이 스스로 서서 걷지 못하는 사그라지는 평범한 사람의 하나 일 뿐이었다. 그 후 85세의 고령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더 살려고 했지만 발달한 현대의학도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최고의 의료진이 정성을 다하였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약이 없거나 모자라지도 않았을 텐데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
입원한 동안 일생의 정치 라이벌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방문 화해는 화제가 되었고, 사형을 구형했을 당시 권력의 정점에 계시던 전두한 전 대통령도 굳은 표정으로 병원을 찾았다. 현 이명박 대통령의 문병도 모두가 엄숙한 죽음을 예견한 이별의 모습으로 보였다. 죽음을 예견한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화해의 몸짓이지만 그래도 좋아 보이고 많은 화재를 남겼다. 결국은 병마와 죽음의 싸움은 끝나고 운명하였다. DJ를 따르던 지지자들은 애도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북한에서 조문단이 전용기 편으로 왔다. 소위 집권 당시 햇볕 정책으로 불리던 북한 돕기에 감사의 의미와 남북 간의 경색국면을 풀어내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북한당국의 속셈도 있는 줄도 모른다. 예견할 수 있는 죽음이고 장례기간 북한이 그냥 지나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남공작의 총수가 왔다는 것은 그들의 전략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85세로 인간의 생명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서거했다. 뉴스의 초점은 이사실로 온통 나라가 떠들썩하다. 죽은 후에 장례절차도 계급이 있는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은 자살을 왜 서거라는 이름으로 국민장으로 온통 세상의 일이 이것이 제일 중요한 사건처럼 분향소에 지지자들이 시청 앞에 모여서 문화제를 열고 분향소를 어디에 차리느냐고 논란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온 세상이 한바탕 소용돌이쳤는데 또 이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전 전 대통령으로 병원생활이 충격의 완충지대가 되어서 그런지 훨씬 조용한 것 같다. 그런데 모든 장례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고 장례위원장이 현직 총리가 맡는 국장이라는 점이 크게 다르다. 왜 그렇게 요란하게 죽음이 슬픔은 사실이지만 전국에 지방자치단체에까지 분향소를 만들고 장례 절차가 낭비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나의 편견일까?
누구나 가야 할 길 순리대로 갔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생명의 한계는 대통령을 한 분도 누구도 예외가 없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실 줄 누구라도 알고 있었고 자신도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랜 세월 생각하지만 5천 년 역사의 길목에 85세의 세월은 순간일 뿐이다. 대통령의 재임 시 생각 실적은 기록으로 남고 국민의 가슴에 남기면 된다.
소위 친북 정권으로 불리던 두 분 대통령이 이 세상을 떠났으니 다음에는 누가 이 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하며 정치를 이어갈까 관심사이다. 3김의 정치라던 세 김(金) 가운데 중심에 있던 김대중(金大中) 님이 사라졌다. 남은 두 김(金)은 이제 정치의 중심에 비켜 있어 한국정치를 주도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도 돌아가시면 또 국장(國葬)으로 치를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장례식도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하며 국장을 고집할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돌아가실 즈음 나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면 좋을 것 같다. 퇴직하고 여러 해 지났으면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보다는 국민장이나 사회장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한다.
인생이 일생일 뿐이다. 똑같은 시간의 공간에서 하루 세끼씩 먹어야 하고 잠자야 하고 호흡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숨 쉬지 못해도 죽고 먹지 못해도 죽고 움직이지 못해도 죽는 육체를 가지고 동분서주하는 우리의 모습이 죽음을 보면서 좀 더 겸손해야 하고 낮아져야 한다. 이 세상에서 저 잘났다고 건방 떨고 거만하고 우쭐대는 사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속으로 웃어주고 산다.
국장(國葬)은 무슨 의미가 있고 국민장(國民葬)은 죽음 뒤에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같은 대통령을 했는데 한 분은 고향마을에 작은 비석으로 남고 한 분은 국립 현충원에 당당하게 남는다. 왜 그렇게 되었나? 죽은 당사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이 만드는 것이다. 권력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칠수록 죽음을 과장하고 요란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의 죽음이 생각난다. 중국 진시황제의 무덤도 생각난다. 순장하던 시절의 왕의 모습도 떠오른다.
문제는 형식에 너무 민감해하는 것은 남아있는 이들의 자기변명이고 과시하는 모습이다. 대통령의 업적이나 생의 귀감이 되는 부분을 간과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살아있을 때 그토록 국민의 인권과 평화와 자유와 민주를 외쳐대던 국민 대부분은 일자리가 없어 가난하게 살다가 죽으면 존재 없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면서 납골당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들의 지지해 주고 투표해서 대통령이 되어 영광을 얻고 살았고 또 죽어서도 그들이 낸 세금으로 호화롭게 국립묘지로 간다. 인간적으로 무척 그 모습이 부럽고 또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생애를 살아온 사실을 폄하하지 않는다. 장례식은 장엄하였고 TV를 통하여 구경하는 동안에 정말 잘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거듭 다짐했다.
그렇다고 살아가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지략을 모아 출세하여 살아야 하는가? 오늘날 정치인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학생들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국회가 툭하면 난장판이 되는 관행의 뿌리는 반대를 위한 반대와 3김(金)의 이합집산과 권모술수로 국민을 이용했던 정치 스타일이 오늘의 모습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죽으면 누구나 관대하게 장점만 보고 그의 삶에 대한 비판은 가급적 삼가는 것이 우리의 미덕이다. 전직 두 대통령이 한국 정치 문화에 큰 획으로 발자취를 남긴 점을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항상 지지자도 있었지만, 반대 입장에 서서 소리치던 사람도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평생을 살면서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고 죽은 후에도 모두 아쉬워하는 삶이란 성직자가 아니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죽음은 다가온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민족사의 가장 우뚝 서 있지만, 왕릉은 왕정시대의 유물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장에서 순국했는데 묘는 잘 가꾸어 있지만, 후손이 관리하고 장례식에 초점은 모이지 않는다. 이승만 대통령도 외국에서 돌아가셨지만, 말없이 조용히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살아있을 때 잘해야지 죽은 후에 장례식과 무덤은 모두 형식일 뿐이다.
살다가 죽은 후에 눈 마주치며 서로 웃고 이마와 무릎 맞대고 고민하며 살던 가족과 친지끼리 모여서 형식보다는 진심으로 뜨거운 눈물 흘리며 이별을 애통해하는 장례식도 멋있을 것 같은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그와 같은 장례 모습이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한다. 끝
----------------------------------------------------------------------------------------------------------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유언
De Gaulle 프랑스 대통령 서거와 유언
[김국장의 퍼온글 옮김]
제2차 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드골 대통령의 逝去(서거)가 생각 납니다.그는 유언에서 ‘家族葬으로 할 것’ 과 함께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參禮 (참예) 하는 것을 못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그러나 “2次 大戰 戰爭터를 누비며 프랑스 解放을 위하여
함께 싸웠던 戰友(전우)들의 참예는 하도록 하라”고 許用했답니다.정부는 이 遺言을 존중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영결식을 가졌으나대통령과 장관들은 영결식장에 가지 않고각자 자신들의 사무실에서 묵념을 올리고 기도했습니다.드골 전 대통령은 자신이 사랑했던 장애자였던 “딸의 무덤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죽은 후 묘비를 간단하게 하라.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만 쓰라”고 했습니다.그래서 드골 전 대통령의 묘비에는 그렇게만 적혀 있습니다.그리고 드골은 태통령 퇴임 후 정부가 지급하는 퇴임 대통령 年金과그 가족들에게 지급하는 年金도 받지 않았습니다.드골은 “그 돈은 불쌍한 국민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했습니다.그에 따라 정부는 드골 퇴임 후 본인은 물론 서거 후 미망인, 가족들에게 나가는
연금도 무의탁 노인들과 고아원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신탁기금에 보내사용하고 있습니다. 드골 대통령의 가족들은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드골 대통령이 출생하고 은퇴 후 살던 生家(생가)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그 저택을 팔았습니다. 그 저택은 어느 재벌이 구입, 정부에 헌납하여지방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해 드골 기념관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세계 유명 대통령의 장례에 대해 알아 본즉 드골 같은 분들도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파리 드골 국제공항에서-유흥주)
'...♤ 이보규와 생각하기 > _ 이보규자유로운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내 자동차로 200,000Km를 달렸다. (0) | 2009.10.28 |
---|---|
드디어 "이보규와 동행" 카페회원이 500명을 돌파했습니다. (0) | 2009.10.19 |
혼자서 많은 재주를 가진 친구 (0) | 2009.08.06 |
친구의 죽음 앞에서 (0) | 2009.07.18 |
소낙비 오는 날 지하철역 우산 파는 아줌마 (0) | 2009.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