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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정에서 4대째 남자를 다 씻어준 여인

이보규 2010. 7. 19. 21:52

위대한 한국의 여인

                                                                                                                                       청암 이보규

 

요즈음 아내의 일과는 첫 손자를 집에서 돌보는 일이다. 지난해 여름 출산한 며느리가 휴직 기간이 다되어 직장에 첫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유아원에 맡기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했나보다. 손자의 항문주변에 습진이 생기고 감기로 중이염도 걸리고 보니 아이하나 기르는 것이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득이 아내가 돌보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여보! 빨리 와! 이것 좀 잡아주어”

화장실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에 급히 달려갔다. 손자 동규가 기저귀에 큰 볼일을 본 것이었다. 나는 동규를 잡고 아내는 세면대에서 손자의 고추를 손으로 씻어 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이 집안에 시집와서 4대째 남자를 다 만지고 씻어주고 있네 그려!........ ”

“.............?”

 

처음에는 무슨 뜻인 줄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아들 6형제를 낳아 길렀지만 딸이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그 뒤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동을 못하시는 아버지의 수발을 며느리인 아내가 감당해야했다.

 

그 울퉁불퉁하시던 근육 어디 가고 앙상해진 다리로 걸음이 힘들어 누워만 계시던 아버지…….나중에는 걷지도 못해 대소변 누워서 보시면서 치매는 더 심해지셨다. 그 과정에서 시아버지를 모시는 아내가 내 눈에는 천사로 보였다. 시아버지의 귀저기를 바꾸어 채워드리고 목욕시키는 모습은 시아버지의 권위도 며느리의 수줍음도 다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있었다. 그러니 첫 번째 사랑의 헌신 봉사 남자는 1대인 시아버지로 아내는 젊은 시절 부끄러움 접어야 했다. 기저귀를 바꿔 채우며 시아버지를 매일 씻어주었다.

 

두 번째 대상의 남자는 명색이 남편인 나였다. 다섯 번에 걸친 전신 마취수술을 할 때면 어김없이 아내는 내 옆에서 간호하는 일을 해오곤 했다. 두 번의 고관절 수술인데 수술 후 한 동안은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동안 제일 어려운 일이 대소변 보는 일이었다. 병원에서 환자를 수발하는 일을 언제나 아내의 몫이었다. 고관절 수술을 하고 나면 한 동안 서서 걷지 못하니까 침대에 누워서 대소변을 보아야 했다. 아무리 부부사이라지만 뒤처리를 아내에게 맡기고 누워있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대상의 남자가 아들 둘을 낳아 기르는 일이었다. 아이 하나를 돌보는 것이 정말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손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은 여자들이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이 즐거움도 있겠지만 힘들고 일방적인 의무라서 고통의 세월이기도 하였으리라. 이번에는 네 번째로 손자 까지 돌보고 있으니 여자로 태어나 가정을 지키고 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이 여자의 숙명이라고 말하기는 너무나 가혹한 것 같다.

 

이제 내 나이 70에 이르고 보니 불현듯 만약 지금 아내가 없고 내가 아버지처럼 며느리 집에 누워서 몇 년을 있게 되면 우리 며느리가 아내처럼 할까 생각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 줄도 모르겠으나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아내보다 더 먼저 세상을 떠나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아내의 건강을 내 몸보다 더 소중하게 내가 챙겨야 하겠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내의 손에서 나를 맡기고 눈을 감고 싶다. 손자를 닦아주는 아내의 모습, 하염없이 지켜보면서 새삼 아내가 정말 소중한 존재임을 절감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의 삶속에 가족을 돌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오늘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돌보아준 많은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번했다. 그 일을 지금에 와서 기억한다고 해도 돌아가신 부모님께 무엇을 해드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빛과 영광도 없이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애를 회상하게 된다. 13년 동안 누워만 계시던 나의 할머님의 고향에서 모시고 사셨다. 우리 6형제를 낳아 먹이고 입혀서 기르신 어머니이다.

 

내가 신혼 때는 식모를 구하지 못해 당시에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출근하는 며느리가 맡기고 간 손자를 돌보시던 어머님이 생각나 더욱 그리워진다. 우리나라 모든 어머니의 희생정신의 위대하심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람은 바뀌어도 돌고 도는 생활모습이 너무 닮아간다. 어머니가 하던 일을 이제 아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머니라는 위대한 여인이 큰 바위처럼 존재하는 사실을 잊고 살아 갈 번했다.

 

귀여운 첫돌이 다가오는 손자가 태어나 지금 자기가 기저귀를 차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웃으며 온 집안을 기어 다니면서 잘도 놀고 있다. 인생은 이렇게 태어나 웃고 자라고 또 늙어가는 것이 아마도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다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애를 서서히 즐거운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도 자연의 순리요 아름다운 노심이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