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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동 고갯길의 리어카 꾼

이보규 2004. 2. 29. 23:28

                                                         

                                              아현동 고갯길의 리어카 꾼

    이  보  규

( 21C사회발전연구소장

前 서울시한강관리사업소/소장)


서울시 공직생활 36년은 내 인생의 전부였음에도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순간처럼 지나가 버린 세월이기도 하다.


재직 중에는 늘 긴장된 날들이었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 던진 느슨한 마음으로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면

별것도 아닌 일에 너무 신경을 쓴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먹었기에 대가없이 정년퇴임을 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생을 직업공무원으로 근무하다보니 업무적인 중압감도 크지만

동료들과 어울려 지낸 세월이 그렇게 경직되고 무거운 것만이 아니라

보람과 즐거움도 많고 잊지 못할 추억도 많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서울시공무원 공채시험을 거쳐 첫 발령을 받은 것은 1966년 11월 1일 이었다.

근무지는 마포구 아현5동사무소, 업무는 병사와 사회담당 이었다. 

충북 괴산이 고향인 나는 상경후 거처가 마땅치 않아 동사무소 숙직실에 기거하며 야간대학에 다녔다.


책상머리에 의젓하게 앉아 시정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공무원 인줄 알고 왔지만

그 당시 동사무소 일이라는 것이 길 물으려 오는 사람 길 가르쳐 주기,

분뇨수거 안내, 밀가루 배급 등의 민생문제가 거의 전부여서

동사무소는 이런 민원인들로 일과 시간과는 관계없이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관내에서 아사자가 생기지 않도록

밥을 굶는 영세민에게 긴급 구호양곡을 골고루 나누어주고

법정 생활보호 대상자에게는 정기적으로 밀가루 배급을 주며

또한 미국 원조물자인 PL480 양곡으로 영세민에게 취로사업을 시키고 노임으로 양곡을 나누어주는 일이었다.

 

당시 도화동 마포종점에 위치한 구청창고에는 영세민용 밀가루가 가득했다. 

이것이 각 동으로 배정되면 리어카로 동사무소 창고까지 옮겨야 했다.


다른 직원들이 맡아 할 때는 인부들에게 싣고 오게 맡겼지만

나는 혹시 그렇게 하였다가 운반도중 현물이 증발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늘 잠바차림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리어카 뒤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아현동 고갯길에 들어서면 리어카를 끄는 인부는 몹시도 힘들어했다.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리어카 뒤를 밀어 주느라 함께 땀을 흘려야 했다.


어느날 우연히 그 고갯길에서 한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리어카를 밀고 가느라 긴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어 손만 서로 흔들고 헤어졌다.


그후 고향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이보규가 서울시청 공무원이 된 것이 아니라 아현동 고갯길에서 리어카 꾼으로 일하더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 급기야 아버지까지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고향에 갔더니 아버지께서는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그냥 시골에 내려와서 농사나 짓자”고 진지하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

네 아버지가 밖에서 무슨 소문을 들으신 것 같다’고 하셨다.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그 친구를 만났다.


네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였기에 온 동네에 내가 리어카 꾼으로 소문이 났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나는 본대로 말했을 뿐이다”라며 몹시 미안해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우습기도 하고 하도 어이가 없어

“내가 언제 리어카를 끌었냐? 뒤에서 밀고 다녔지”하며 함께 한바탕 웃고 말았다.


그 시절 아현5동 관할의 고지대는 무허가 단칸셋방에 여러 식구가 가난하게 사는 영세민촌 이였다.


노동력이 없거나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해 끼니를 거르는 집도 많았다. 

이런 때는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열어보아 솥안에 온기가 없으면 밥을 못 해 먹는 집으로 판단,

긴급구호 양곡을 주기도 했다.


노동력이 있는 영세민은 취로사업이라고 해서 아현천 준설작업장에서 일하게 하고

밀가루를 노임으로 주었는데 그 일도 서로 하려고 다투었지만 배정량이 많지 않아

작업 일수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어 안타까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당시의 주택가 대문 앞에는 집집마다 콘크리트로 된 쓰레기통이 있었다. 

골목마다 청소원(지금의 환경미화원)들이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쓰레기를 수거해 갔는데

마을마다 쓰레기 적환장이 있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골목길에서 수거식 변소의 인분을 퍼내는 분뇨통을 짊어진 청소원들의 모습은

그 당시 영세민촌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비가 오면 비포장 골목길은 진흙으로 진창을 이루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생겨 날 정도였다.

 

그래서 지저분한 골목길 청소를 위해 “매주 수요일은 시민 청소의 날”로 정하고 조기청소를 하였는데

그 일은 동사무소 직원이 앞장서야 했다.


동사무소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작업장으로 갈 때

내가 빗자루를 군에서 소총을 메듯이 어깨에 메고 걸어가자 빗자루를 뒤에 끌고 가던 고참직원이

“너는 빗자루가 총이냐? 창피한 줄도 모르는 놈”이라고 놀려대면

“군인은 총이 생명이고 동사무소 직원은 빗자루가 밥줄”이라고 되받아 웃기도 했다.


그 당시 종로, 을지로, 아현동 등은 모두 전차가 다녔다. 

자가용은 정말 부잣집에나 있었고 사람들이 택시를 타고 다니면 그것은 사치였다.

동사무소의 겨울 난방은 제재소에서 나온 톱밥을 연료로 하는 톱밥 난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가정에서는 연탄을 연료로 취사와 온돌, 난방을 하였는데

연탄 비축량이 그 가정의 경제 사정을 짐작하게 하는 잣대였다.


그 시절 서울시의 행정구역은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동대문구, 서대문구, 마포구, 영등포구, 성동구, 성북구 이렇게 9개 구청이었다.


매년 효창운동장에서 9개 구청대항 직원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동사무소에 근무하였지만 체육대회가 있을 때마다 구청선수로 차출되어

응원단장을 맡아서 박수, 춤, 카드 섹션을 지휘하곤 했다.


그후 응원단장이 계기가 되어 구청 총무과에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함께 근무하는 계장 한 분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매일 퇴근길에는 공덕동 단골 술집에서

외상으로 술을 마시고 그 외상술 값은 언제나 내가 갚아야 했다. 

힘들게 돈을 마련하여 겨우 외상술값을 갚고 나면

또 그날로 외상 술을 마시고 하여 외상 술값은 매듭지어질 날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앞으로 직급이 높아져도 부하직원과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값을 부하직원에게 절대로 떠넘기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부하에게 강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 원칙을 정년퇴직 할 때까지 일관되게 지켜냈다.


그후 가끔은 중간관리자로서 부하직원들과 술도 마셔야 할 때도 있었지만

처음 생각을 흐트러짐이 없게 하기 위하여 입술을 깨물고

그때를 회상하고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처음 동사무소에 발령 받고 나서 3년 10개월만에 7급(당시 4급을류) 승진시험에 합격하여

누구나 근무해보고 싶어했던 시청 행정과로 발령을 받는 행운을 얻었다. 

비로소 서울시 시청 공무원이 된 것이었다.

 

(2003.7.17  다음기회에 계속 하기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