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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일본시찰기-⑤- 농업위주산업구조의 탈피(81.02.14)

이보규 2007. 9. 6. 10:30

 

 

대만 일본을 다녀와서 (視察記)-⑤ (81.02.14)

 

                                     농업위주의 산업구조에서 탈피

 

                                                   서울시 새마을지도계장 이보규


 

대북에서 맞이한 첫날 아침 - 창밖에는 가랑비가 내려 거리와 지붕,

그리고 나뭇잎들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날 일과는 오전9시부터 중화민국(中華民國) 행정원의 경제건설위원회 한국대사관,

그리고 사구발전(社區發展)연구훈련중심을 차례로 방문하고 현지 마을을 시찰하도록

정해져 있어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 서둘러야 했다.


돈을 주기로 하고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버스를 타고 총통집무실이 있는

단일로(段一路) 관청가에 다다르니 웅장한 행정원 건물과 넓은 거리와 광장,

잘 가꾸어진 녹지대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위엄 있게 보였다.


또한 쑨원(孫文)의 대형초상화가 행정원 동문(東門)앞에 우람하게 걸려있고

큰 길옆 공간에는 붉은 대형글씨로 "自立自强" "三民主義萬歲"등

국민총화를 다지기 위한 구호가 거리에 가득 차 열기를 반산하는 듯 했다.


우리 일행은 경제건설 위원회를 찾아가 미리 준비된 회의실로 안내되어

사문전 종합계획처장으로부터 대만 경제 전반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기획원과 거의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이곳은

다소 운영을 달리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즉, 국가경제계획과 건설에 대한 종합적인 조정과 심사기능을 담당하는

막료 조직으로서 재정부장관, 교통부장관, 행정원 비서장, 중앙은행장 등

9명의 위원이 매주1회 정기회의를 통화여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준비된 영문 슬라이드를 보고 위원회의 조직과 운영 실태 등

경제 전반을 이해하고 나서 보충설명을 통하여 경제적인 배경을 들었다.


이곳 경제정책의 방향이 농업위주의 산업구조를 의도적으로 탈피공업화로

방향을 전환한 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그 결과 79년도에 8.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 국민1인당 소득도 1,869(弗)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따라 수반하는 물가상승 문제가 크게 대두된다고 전제하고

지난 10년간 안정된 물가를 유지해왔으나 79년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소비자물가가 그해에 10% 상승했으며 80년도에는 국제적인 유류가 인상으로

18%의 물가 상승이 예상된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비산유국으로서 산유국의 일방적인 유류가 인상으로 인한

국내 물가상승의 압박을 받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인 듯 했다.


대만과 우리나라를 경제면에서 알기 쉽게 비교해보면 인구는 우리나라의 약 ½,

국토면적은 남한의 약 ⅓이 조금 넘고 있는데 수출경쟁에 있어서는

79년도 우리가 156억불의 수출을 달성한데 비하여 163억불의 수출을 이룩했고

유독 주목되는 것은 수출입수지에 있어 우리나라가 27억불의 적자를 낸데 비해

이들은 오히려 13억불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의 온 국민은 보다 더한 경쟁의식 속에 아직도 더욱 분발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러나  대만 역시 수출에 있어서는 미국이나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이에 대한 대책을 부심하고 있는 흔적이 역역했고

특히 대일본 수출에 있어 무역적자폭이 해마다 늘어나는데 대해

깊은 고충이 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친절한 경제전반에 대한 설명에 감사하는 뜻으로

준비해간 홍보유인물과 인삼차, 김 등을 선물로 전달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한국(韓國)대사관으로 향했다.


현대식 단독빌딩으로 건물외형에서 풍기는 멋도 있었지만

특히 입구 벽에 새겨진 태극기가 우리를 반겨주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우리는 3층 회의실로 안내되어 옥대사로부터 따뜻하고도 친절한 영접을 받아

무척 감사히 생각했다.

옥(玉)대사는 주재국 대만의 정치사회ㆍ경제 등을 비교적 폭넓게 소상히 설명했다.


내가 관심을 갖은 것은 대만에 거주하는 동포가 약 1천1백명,

이중에서 교포가 8백여 명이고 나머지 300명이 우리나라 유학생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나라 유학생이 외국에 많이 나간다는 사실은

밝은 내일을 기약하는 좋은 현상이 아닐수 없었다.


불현듯 조선말 개화기인 1881년 새로운 문물을 익히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신사유람단과 청나라의 권유에 따라 김윤식(金允植)을 영선사로 삼아

유학생 100여명이 신무기 제조법을 배우러 갔다는 역사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물론 지금의 국제적인 현실이 그 당시와는 모든 면에서 판이하다지만

우리는 다른 나라의 선진사례를 재빨리 배워서 국제경쟁에 이겨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그들은 진정 민족의 희망이요, 새 역사를 주도해 나아갈 내일의 주인공들이 아닐까?


우리는 많은 유학생들을 보내고 또 학생은 선진 문화를 빨리 배우고 익혀서

국가발전에 기여하게 해야 한다.


오후 우리 일행은 대북 시정부(市政府)산하의 사구발전연구중심을 방문

지역사회개발(우리나라의 경우 새마을운동)의 추진 방향과 내용을 종합적으로 배웠다.


짧은 기간이나마 사구(협동단위)는 300호를 기준으로 한 이와 같은 사구가

약 4천개나 있었으며 사구발전을 위한 업무를

시의 사회국에서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과 흡사했다.


즉, 생산복리, 정신윤리, 기초공정등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도

우리나라의 초기 농촌새마을운동의 방향 이였던

마을단위의 소득증대, 정신계발, 환경개선 사업에 목표를 두어온 점과 비슷했다.


건물에 냉방이 안 되어 무덥고 좁은 회의실에 앉아서 슬라이드를 보고나서

설명을 듣는 동안 남자직원들은 앉아 있고 배가 몹시 부른 임신부여직원이

혼자서 20여명이나 되는 우리일행에게 차와 과일을 날라 대접하는 모습이

어찌나 몸놀림이 무겁고 거북스러운지 앉아서 받아먹기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