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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떠나신 이석준 동장님을 그리며

이보규 2007. 10. 15. 23:04
 
   이 세상을 떠나신 이석준 동장님을 그리며

                                                                                                     

 

 

                                                                                                                        청암 이보규

 

 

내가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1966.11.1 당시 마포종점에 있는 마포구청에서 처음 발령받은 곳이 마포

 

구 아현제5동 사무소이다. 지금은 이미 다른 동사무소와 합병되었고 동사무소 건물도 도로 확장으로 철거되었

 

지만 내 생애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마포종점에서전차를 타고 다다른 곳이 아현초등학교 앞에 있는

 

동사무소를 찾았다. 낡은 목조 2층 건물에 동사무소 간판이 걸려 있고 사무실에서 연기가 가득한 톱밥 난로를

 

피고 있었다.

 

 

사무실을 찾아가서 발령장을 내밀자 40대 후반의 대머리(?) 동장이 만면에 미소를 담고"찾아오느라고 고생은

 

안 했어요?" 하면서 친절하게 악수를 청했다. 그분이 내가 잊지 못하는 이석준 동장님이고 동장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졌다. 자상하면서도 말소리도 적고, 맑은 눈빛이 모든 것을 알고 있

 

는 듯 했다, 그러나 풍기는 인품이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계셨다.

 

 

당시 동장님은 아현동 마루턱 고지대에 아버님을 모시고 5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대가족으로 사시면서 옛날에

 

지은 나지막한 집에서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계셨다. 처음 동장님께 머리를 숙인 이유는 그분의 부지런하신 삶

 

의 모습이었다. 내가 아무리 일찍 출근을 해도 동장님은 이미 사무실에 먼저 나와 앉아 계셨다. 나중에 안 사실

 

이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사모님을 도와 드리려고 손수 연탄을 갈고 나서 집안과 골목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하

 

고 나서 출근하였다.

 

 

동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에 관내를 한 바퀴 순찰을 하신 후 사무실로 출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겨우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하는 것도 동장님 보다 늘 한걸음이 늦었다. 관내에서 오랫동안 살고 계시기 때문에 주

 

민들의 생활 형편을 대부분 다 잘 알고 계시고 주민과 마찰이 있는 힘 드는 업무는 언제나 동장님이 스스로 처

 

리해 주었다. 당시에 술주정꾼이 술을 먹고 와서 술주정을 해도 다 받아 주셨다. 당시 고지대 무허가 집이 많고

 

생활보호대상자가 많았지만 주민의 생활수준을 다 알고 계서서 아주 공정하게 처리 하셨다,

 

 

나는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 바로 얻은 직장이라 당시 군기(?)가 살아 있었다. 나는 다른 직원들에게 뒤질세라

 

열심히 일했다. 관내를 돌아다닐 때는 뛰어 다녔다. 시골에서 아버지께서 이장으로서 면사무소에서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을 늘 보아 왔기 때문에 동사무소 업무가 낯설지 않았고 또한 별로 힘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

 

려 재미있었다.

 

 

처음 보직을 병사업무로 시작해서 영세민을 돌보는 사회업무를 담당했다가 당시에 관행으로 선임자들이 맡아

 

서 하던 서무 담당 업무를 동장님의 지시로 6개월 만에 보직을 바꾸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말단 직원에게 서무

 

업무를 시키는 것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동장님은 나를 믿어 주셨고 젊고 능력 있는 사람이 일을

 

많이 해야 한다며 동사무소 살림을 하는 서무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부담이 되고 일부 선배 직원들이 불

 

만을 보였지만 동장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나는 동장님이 무척 고마웠고 나를 신뢰 하여 주시는데 대

 

하여 더욱 감격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시골에서 혼자 올라와서 숙소가 없는 나에게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자취 하면서 생활하는 것

 

을 묵인해 주셨다. 더구나 숙직실에서 자취를 하면서 야간대학교를 다니도록 편의를 베풀어 주었다. 당시 중앙

 

청 옆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국민대학 야간부에 전차를 타고 통학했는데 일과 시간이 끝나기 전에 학교 가는

 

일에 조금도 눈치를 주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여 주셨다. 일직 퇴근하는 일이 미안해서 조금 눈치 보느라고 머

 

뭇거리면 "오늘은 학교 안가나?" 하면서 빨리 가라고 재촉하곤 하셨다. 

 

 

기관의 어른인 동장이 부하 직원에게 베풀어 주는 정과 사랑은 자신은 느끼게 마련이다. 어느 때는 동장 댁에

 

서 동장님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사모님과 아이들도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가족 같은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동장님이 부모님처럼 생각 하게 되었다.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자취하면서

 

근무하고 또한 야간대학 다니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결혼을 해서 생활을 안정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아내와 약혼을 하였지만 결혼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숙직실에서 신혼살림을 할 수도 없고 셋방을 얻어야 하는데 학교 등록금을 모두 내고난 후 당시 제일 싼 10만

 

원짜리 단칸 전세방을 얻기 위한 계약금 1만원도 내주머니에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동장께서는 1만 원을

 

빌려 주고 방을 계약 하라고 하시면서 결혼 준비를 챙겨 주셨다. 아내의 혼수 준비로 마련한 돈까지 모아서 집

 

안의 도움을 합하여 겨우 방값을 지불하고 결혼식을 하는데 동장님이 청첩장을 가지고 유지분이 오시면 우리

 

서무 장가간다고 부조금도 챙기시는 자상한 분이였다.

 

 

예정된 날짜에 결혼식을 끝내고 나서 별도로 신혼여행도 가지 못하고 수유리 그린파크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관내에 얻어 놓은 전세방에 와서 보니 담장 옆에 연탄 100장, 방안에는 쌀 한가마니, 부엌에는 김치 한 항

 

아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로써는 대단이 큰 재산이다. 나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전셋집 주인아

 

주머니의 말을 들으니 동장님께서 미리 둘러보시고 가져다 놓고 가셨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어느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큰 도움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고학으로 신문 배달을

 

할 때도 군 생활 할 때도 나는 늘 혼자 울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해 왔다. 나는 그 순간 혼자 결심 했다. 이

 

분을 내 일생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하며 쌀가마니를 앞에 두고 아내와 마주 보고 눈

 

물을 흘리고 있었다.

 

 

매년 설날과 추석날이면 고향 부모에게도 못가서 뵐 때라도 동장님에게 문안을 드리는 일을 그 후 40여년을 계

 

속해서 지키려고 노력 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나의 사부였고 스승이었다. 내가 승진하였을 때나 내 집을 마련

 

했을 때나 표창을 받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물론이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전화 드리면 언제나 친

 

절하게 대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분을 처음 공직에서 만나 그분의 정신을 받아드리지 않았다면 대학

 

도 다닐 수 없었고 내가 공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9급 동사무소에서 충발해서 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정년

 

퇴임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긍정적이시고 만나는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셨다. 공직을  퇴직 하신 후에도 마을금고 이사장으로

 

봉사 하실 때도 언제나 공정 하시고 남다르게 봉사 정신이 투철하셨다. 가정에서는 사모님의 말씀은 무조건 따

 

르시는 온화한 성품을 지니셨지만 자녀의 교육은 엄격하면서도 자율적으로 하도록 지도하는 탁월한 리더십을

 

지니신 분이었다. 아드님 두 분 모두 서울대학교 명문대를 졸업하도록 훌륭하게 키우셨다.

 

 

 

지난 설날에는 인사를 드리려고 집에 갔더니 마침 동네 노인정에 가셔서 그곳으로 찾아갔더니 그토록 반가워하

 

시던 그 순간의 모습이 생전에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올해 추석을 며칠 앞두고 인사드리러

 

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차에 이른 아침에 사모님께서 떨리는 목소리로 별세 소식을 알려 주셔서 병원으로 달려

 

갔지만 이미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눈물뿐 이였다. 동장님은 89세의 일생을 건강하게 사셨는데 일주일간 병

 

원에 입원하여 계시다가 생을 마감 하셨다

 

 

동장님을 자식들 5남매를 모두 잘 키우셨다. 아들 형제와 사위와 따님들이 영안실에 서서 조문객과 인사를 하

 

고 있었다. 아산병원 영안실에는 성공한 아드님 두 분과 사위들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둘째 아드님이 현직 경

 

찰청장이라서 사회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서 각계에서 보내온 조화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고 이름이 적힌 리본

 

만을 벽에 걸었는데 그 줄이 길게 장사진을 이루었다. 참으로 많은 조문객이 찾아왔고 그분의 성공적인 생전의

 

삶을 재조명 하는 듯했다.

 

 

이택순 경찰청장이 나를 보자 낙산사 큰스님 등에게 따로 인사를 시키며 아버지 생전에 계실 때 제일 좋아하시

 

던 부하라고 나를 소개 할 때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분이 베풀어준 사랑에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한  부끄

 

러움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생전에 계실 때 좀 더 잘해 드릴 걸 하는 아쉬움에 가슴에서 부터 눈물이 고였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살았지만 가족이 아니면서 가족애를 느끼고 정을 나누

 

며 살아온 분이 오직 동장님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산병원 영안실 2층에서 큰 스님의 집례로 발인하는 날 아침이 잊히지 않는다. 운구하는 장례 절차를 지켜보

 

면서 나의 삶에도 이제 석양이 드리우는 것을 생각하니 숙연해지는 것을 숨길 수 가 없었다. 나는 동장님처럼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정을 나누어 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 그동안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 슬

 

퍼한 적은 있지만 이날처럼 가슴에서 눈물이 흐르고 떠난 자리가 크게 허전한 적은 별로 없었다. 고인의 명복

 

을 빌고 다시 한 번 동장님을 그리며 그 사랑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