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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하는 남자

이보규 2017. 3. 2. 10:11

  

               설거지하는 남자

                                                                                 청암 이 보 규

 

누구나 집안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동안은 여러 가지일이 벌어진다.

그 중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 주방의 설거지이다.

하루 세끼 음식을 먹고 나면 그 그릇을 물로 씻어야 하는 일은

단순하지만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이다.

결혼 후 48년 동안 우리 집에서 늘 그 일은 오직 아내만의 몫이었다.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거나 생색나는 일도 아니기에 나로서는 늘 무관심으로 살아 왔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남자는 부엌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남자가 부뚜막 냄새를 맡으면 조잔해져서 못쓴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머니도 이승을 떠나시고 오직 집에는 아내와 둘이서 살아 온지 십 수 년이다.

지난해 추석명절을 앞두고 아내가 무릎을 다쳐 서있지도 못하고

자유롭게 걷지도 못하게 되어 요즈음은 그 설거지가 내 몫이 되었다.

단둘이 살다가 아내가 다치고 보니 자연히 집안 자질구레한 일이 내 몫이 되고 말았다.

 

아내가 무릎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그 일을 할 사람은 오직 나밖에는 없어

매일 그 일을 하게 되었고 결국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수술을 위해

약 한달 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미리 수술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갈비탕과 우거짓국, 육개장, 미역국 등을

만들어 비닐 팩에 넣어 냉동실에 가득 채워 두고서는

미리 냉동 음식을 녹여서 냄비에 끓여 먹는 요령의 예행연습을 나에게 시켰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는 날 지켜주지 못하고

강의 때문에 수술 후 저녁때에 병원을 방문하곤 했으니 미안도 하지만

나의 독거노인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고 계속되었는데. 제일 서툰 일이 설거지였다.

혼자 밥 준비하고 반찬, 국 챙겨 먹고 설거지 하고 매일 아내 병원에 들려 문병도 해야 했다.

기름이 묻은 그릇은 세제 ‘퐁퐁’으로 닦고 밥그릇은 뜨거운 물로 씻어내고

다시 헹구어야 하는 것도 알았고 설거지란 걸 처음 해 보았지만

아마도 앞으로 아내가 완치 한 후에도 계속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결혼한 지 48주년이 지났는데 정말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살았으니

정말 고마운 일로 아내는 부부싸움 중이라도 꼬박 밥만은 해 먹이면서 싸웠다.

식탁에 차려놓고 내가 옆에 있어도 아이들 보고 “아버지 밥 먹으라고 해!”

아이들도 익숙해서 “아버지! 엄마가 밥 먹으래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부부싸움은 끝나고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거였다.

그랬던 아내가 병원 침대에서 간병인 도움만으로 누워 있는 병실에 간혹 가서

얼굴을 내밀고 “괜찮아? 밥은 먹었어?”가 고작이었으니

무던히 나도 싱거운 사람이 아닌 가싶다.

 

통상 주간에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쓸쓸한 시간이라 늘 보는 일일 연속극도

아내와 함께 보아야 “저 죽일 놈 저 나뿐 놈하며 악역에 대해

흥분도 하는데 연속극도 나 홀로 보니 재미도 없었다.

역시나 가족이 좋고 특히 아내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을 것 같다.

병원에 있는 아내가 한 달 가까이 지나도 문병은

아들 며느리가 지성으로 다녀가는 것 같은데 혼자 있는 나에게는

어떻게 식사는 하셨느냐고 전화하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자식 교육을 잘 못 시켰나 아니면 아들 둘이면 목木메달 이라더니

세상인심이 이렇게 됐나싶어 섭섭했지만 내색은 할 수 도 없었다.

그래도 가끔 친구들이 저녁이나 하자고 하면 외식을 할 뿐이었는데

부부의 정인지 사랑인지 아내는 날 보면 라면먹지 말고

밖에 나가서 맛있는 음식사서 먹으라고 병원에 누워서도 잔소리를 했다.

 

요즈음은 강의 요청이 하도 많아 강의안 PPT작업 역시도 틀림없는 노동이다.

아내가 매니저로 강의하려 어디를 가나 운전을 하여 날 도와주었는데

요새는 그리 못하니까 지방에 갈 때는 정년퇴직한 동생의 신세를 지니 그 또한 미안 할 뿐이다.

그리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내가 분리수거라는 것도 어느새 내 몫이 되었다.

다행이 며칠에 한 번씩 오는 가사 도우미아줌마 덕분에

집안청소를 면한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푸념으로 나는 설거지를 매일하느라 주부 습진 걸리겠다고 투덜댔더니

평소에 설거지를 안 하고 살았느냐며 복 받고 살았다고 놀리는 분위기다.

정말 아내보다 먼저 죽어야하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다.

만에 하나 아내가 먼저 이승을 떠나고 혼자 살게 되는 처지를 상상하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몇 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아있는 아내의 병간호를 한 친구가

“당신 살아 있어 고마워” 란 책을 출판한 것을 생각하니

그 친구는 남자 천사가 틀림없다는 느낌이다.

 

누구나 한 평생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나 가야하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그 동안 희로애락의 물결을 타고 사는 동안 남자는 남자의 일만하고

여자는 여자의 일만을 하다가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나의 고리타분한 이기주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남녀평등이니 역할 분담이니 하는 세상의 흐름을 모르고 살아온 내 탓도 있으리라.

 

남자로서 노상하는 익숙한 일도 사실은 귀찮았는데

그 일을 제쳐두고 막상 늙어서 여자가 하던 일들을 도맡아 서투르게 해보니

정말 재미가 없고 나는 남자로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오늘날 나는 아내의 수술한 다리가 어서어서 완쾌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기도하는 심정이 절실하다.

다만 아들 며느리들이란 독거노인(?)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터득한 것도 이번 일이 나에게는 수확이다.

설거지를 하며 억지로라도 나 홀로 웃으며 시공간에 머물러 살아간다.